본문바로가기

1989 ~ 1999

Chapter_ 03

전문화·세계화를 통한 도약

1989 ~ 1999

Image 1

1977. 안양공장 정문 출입구 전경

Image 2

1989.03.25. 노루표페인트 광주지점 확장 이전

Image

1989.03.25. 노루표페인트 광주지점 확장 이전

Image

1989.07.01. 주식회사 프라코 설립

Image

1989.10.06. 주식회사 켐코페인트 창립

Image

1990. 한일은행 45년 장기신용거래 감사패

Image

1990.11.01. 창업 45주년 기념식

Image

1990.11.01. 창업 45주년 기념식

Image

1990.11.09. 안양공장 사료전시실 개관

Image

1990년대 안양공장 통근버스

Image

1991.09.02. 자동차 보수용 도료공장 준공

Image

1991.09.02. 자동차 보수용 도료공장 준공

Image

1991.11. 한국표준색표집 발간

Image

1993. 종합생산성대상 대통령상 수상

Image

1993. 종합생산성대상 대통령상 수상

Image

1993. 창립 50주년 기념 포스터

Image

1993.07.01. 종합생산성대상 대통령상 수상

Image

1994.04.01. 수성자동포장라인 가동식

Image

1994.04.01. 수성자동포장라인 가동식

Image

1994.04.01. 흑색 잉크공장 준공식

Image

1994.11. '한국인의 손길'을 주제로 한 제7회 색채발표회 개최

Image

1995.05.28. 창업 45주년 직원가족 사생대회

Image

1995.06.26. 중장기 경영계획 수립 전략회의

Image

1995.07.03. ISO 9001 인증 획득

Image

1995.07.12. 중국 자금성 보수용 도료 수출 계약

Image

1995.07.12. 중국 자금성 보수용 도료 수출 계약

Image

1995.07.13. 중국 자금성 보수용 도료 수출에 따른 언론기사(동아일보)

Image

1995.11. 창립 50주년 기념식

Image

1995.11.29. 니폰페인트와 자동차용 도료 공장 합작투자계약 체결

Image

1996.05.10. 국산신기술인정서

Image

1996.11.19. 부산공장 준공

Image

1997.03.28. 포항공장 준공

Image

1997.12. 수지 신공장 준공

Image

1998.11.24. 한정대 회장 영결식

Image

대한페인트·잉크주식회사의 제품들

Image

자동차보수용 도료 도장학교 입소식

Image

창업 45주년 기념 영화 '뿌리깊은 나무'

1987년 국내 최초로 색채연구실을 개설한 NOROO는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도료의 기술과 품질뿐 아니라 ‘색’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자동차·가전 등 생활제품과 건축 분야의 컬러 연구를 시작했고, 색채 전문지 발간, 색채발표회 개최 등 독창적 색채문화 활동을 전개했다. NOROO의 이 같은 변화는 도료를 ‘기능’ 중심에서 ‘컬러’ 중심의 감성 언어로 승화시켰으며, 동시에 문화적 영향력을 확대해간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와 함께 지속적인 경영혁신과 전(全)문화에 기반한 분사 전략으로 보다 유연하고 민첩하게 글로벌 시장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컬러’ 중심의 전문화·세계화를 통해 규모의 확대와 질적 성장을 동시에 이뤄낸 것이다.

1.한영재 사장의 취임과 회사의 변화

대한잉크페인트는 1990년대를 앞두고 불어온 전 세계적 개방화 물결에 따라 또 한 번의 선제적 변화를 시도했다. 1988년 12월 1일 한영재 부사장을 대표이사 사장으로 선임하며 새로운 경영체제의 출범을 알린 것이다. 한영재 사장의 취임은 급변하는 경영환경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고 2세 경영체제를 확실히 마무리하려는 한정대 회장의 구상에 따른 것이었다. 한영재 사장은 취임 후 대한잉크페인트를 국제적 초우량 기업으로 발전시킨다는 목표를 내걸고 그 실천방안으로 경영 합리화와 신규사업 진출을 제시했다. 외형 위주의 성장전략 대신 내실 위주의 안정성장을 도모하고, 고부가가치산업의 확대, 기술혁신과 업종 전문화를 통한 경쟁력 강화, 사업 다각화 등을 지속 추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경영체제 정비와 함께 조직 개편도 단행했다. 1988년 12월 1일 제품별 사업부제를 도입하고 회사의 기구조직을 6사업본부, 13실 23부 57과 7지점 4영업소와 기술연구소 체제로 개편했다. 제품별 사업부제는 도료, 잉크, 수지 등 제품별로 사업부제를 운영해 각 사업부장에게 보다 많은 권한과 책임을 위임함으로써 시장 경쟁력을 강화하는 게 목적이었다. 더불어 기업 체질 강화를 위해 교육 전담조직, 신규사업 개발조직, 공정관리 전담부서 등을 신설하고, 기술연구소는 독립 운영체제를 구축했다.

한영재 사장의 취임과 경영체제 정비로 조직의 면모를 일신한 대한잉크페인트는 1988년 4월 15일부터 6월 25일까지 2개월 동안 광고대행사 코래드를 통해 기업 이미지에 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노루표의 브랜드 인지도는 높았으나 대한잉크페인트의 기업 인지도는 낮은 수준임을 확인했다. 대한잉크페인트는 보다 분명한 기업 이미지 확립이 시급하다는 판단 하에 1989년 2월 28일 회사명을 ‘대한페인트·잉크주식회사’로 변경, 기업 이미지 쇄신을 도모했다. 잉크 회사로 출발했으나 잉크보다 페인트의 비중이 더 커진 현실을 반영한 결과였다.

2.초우량 기업을 향한 중장기 경영계획 수립 및 시행

1990년 창립 45주년을 맞아 대한페인트·잉크는 11월 1일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기념행사를 열고 세계 속의 기업으로 도약하는 회사의 위상을 재조명했다. 또한 <대한페인트·잉크 45년사>를 발간하고, 창업자 한정대 회장의 일대기를 담은 기업영화 <뿌리 깊은 나무>(1·2부, 120분)를 비디오테이프로 제작하는 한편, 안양공장 본관 1층에 36평 규모의 사료전시실을 마련해 회사의 성장과정을 보여주는 700여 점의 유물을 전시했다.

21세기 초우량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한 중장기 경영계획도 수립했다. 전체 매출 1조 원 달성, 정밀화학 분야를 주축으로 한 관련 부문의 사업 다각화, 신사업의 적극 개발과 역할 제고가 주요 목표였다. 이의 효율적 추진을 위해 1990년 8월 1일 기구조직 개편도 단행했다. 신규사업 확대를 위해 신규사업실의 업무를 강화하고 도료사업부를 시장별로 2개 사업부로 나누는 한편, 공장 현대화를 추진하기 위해 엔지니어링사업실을 신설했다. 이에 따라 조직은 11사업(본)부, 46부(지점, 실, 팀), 83과(실, 팀, 소)로 정비되었다. 이후 업종별 전문화 정책에 따라 1994년 잉크본부의 독립을 추진, ㈜대한잉크를 출범시켰다.

대한페인트·잉크는 창업 50주년을 맞은 1995년, 신라호텔 다이너스티홀에서 국내외 인사 5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 리셉션을 개최했다. 또 비디오 다큐멘터리 ‘사업보국의 외길 50년’과 대한페인트·잉크의 반세기에 걸친 활동상을 엮은 화보집 <책임과 함께 걸어온 50년>을 선보이는 한편, 안양공장에 ‘창립 50주년 기념탑’을 설치하고, 노루가족 공장방문 행사, 사생대회·백일장 등을 포함한 노루가족 큰잔치도 개최했다. 경영방침의 변화도 추진했다. 모든 경영활동을 고객과 품질 중심으로 전환하고, ISO 9001 인증 획득을 비롯한 좋은 품질과 서비스로 고객에게 사랑받는 기업이 되기 위한 노력을 지속해 나갔다. 또 품질의 세계화, 기술의 세계화, 인력의 세계화를 추진, 경영체제를 글로벌화하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 속에서 대한페인트·잉크는 1993년 7월 제19회 종합생산성대상 대통령상을 수상한 데 이어, 1997년 9월 1일 통계의 날에 또 한 번의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성과를 거뒀다.

3.품목별 전문화와 활발한 신공장 건설

198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한 대한페인트·잉크의 생산부문 전문화·자동화는, 1986년 11월 국내 최초로 전 생산공정을 완전 자동화한 자동차용 도료 및 컬러강판 도료 전문공장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1989년에는 공장합리화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도료 품목별 전문공장체제를 도입했다. 당시 대한페인트·잉크는 5년 후 현재 생산량의 3.7배 이상 생산능력을 갖춘 공장 구현을 목표로, 신공장 건설, 기존 공장 개선, 생산시스템 자동화, 유연한 생산시스템 구성, 쾌적한 생산현장의 건설 등을 적극 추진했다.

특히 신공장 건설에 과감한 투자를 거듭했다. 1989년 3월엔 광주 분공장을 준공, 아시아자동차를 비롯한 대형 거래처 공급 및 애프터서비스 수요 증가에 대비했고, 1990년 8월엔 그라비아잉크 전문 생산공장을, 1994년 4월에는 흑색잉크공장을 준공했다. 둘 다 최신 생산설비와 자동생산라인을 갖춘 최첨단 잉크 공장이었다. 1991년엔 국내 최초로 자동차보수용 도료 공장을 준공했다. 연건평 600평, 연간 최대 6,800톤 생산 규모의 이 공장은 컴퓨터에 의한 자동조색시스템은 물론 전 공정 자동화시스템을 구축, 국내 자동차용 도료부문의 선진화를 이끌었다. 1996년 11월엔 제2분공장이자 영남지역의 거점으로 자리매김한 부산공장을 준공했다. 부산공장은 대지 1만 3,000평, 건평 5,000평, 연간 생산량 4만 톤 규모의 다기능 페인트공장으로, 선박용 도료, 중방식 도료, 건축용 도료를 생산했다. 총 300억 원을 투자해 물류센터, 기술서비스센터 등이 포함된 복합기능 공장으로 설계됐으며, 분체원료의 자동투입장치, 자동계량시스템, 제품의 자동창고연계시스템 등 첨단 자동화 설비를 구축해 생산효율을 제고했다. 1997년 12월엔 안양공장 내에 수지전용공장을 완공하고 1998년 4월 본격 생산에 돌입했다. 총 면적 2,000평, 연간 생산량 2만 5,000톤 규모로 160억 원을 투입해 건립한 수지전용공장은 각종 오염원의 발생을 억제하는 구조로 설계됐으며, 소방설비 및 안전설비 배치, 재해예방시스템 구축 등 안전에도 세심한 배려를 기울였다. 대한페인트·잉크는 수지 신공장의 본격 가동으로 수지부터 도료까지 일관생산체제를 갖추게 됐다.

1997년 3월엔 계열사인 대한인터내셔널페인트가 분체도료 공장을 준공하고 본격 생산에 돌입했다. 경기도 시화공단에 위치한 이 공장은 대기오염, 수질오염, 화재 위험이 없는 첨단 분체도료 공장으로, 향후 환경친화적 도료 수요가 증가할 것에 대한 대비책이었다. 시화공장은 당시 분체도료 공장 가운데 세계 최대 규모였으며, 대지 5,100평, 연건평 3,000평에 연간 8,000톤의 생산능력을 보유했다. 또한 완제품 1,000톤을 보관 및 입·출고할 수 있는 자동화창고와 물류시설을 갖추었다. 비슷한 시기에 포항분공장도 준공을 완료하고 정상가동에 들어갔다. 1997년 3월 28일 경상북도 포항철강산업단지 내에 PCM(Pre-Coated Metal, 착색아연도강판) 도료 전문 생산공장을 설립한 것이다. 대지 3,000평, 연면적 600평 규모에 연간 6,000톤의 생산능력을 갖춘 포항분공장은 물류 효율과 생산성 향상을 최우선으로 고려해 설계됐으며 각종 첨단 자동화설비를 갖추었다. 대한페인트·잉크는 안양·부산·광주·포항·시화 등 지역권별로 특화된 5개 공장을 확보함으로써 건축용 페인트부터 첨단 기능의 페인트까지 품목별 전문공장체제를 구축하게 됐다.

4.기업문화상 제정과 신인사제도 도입

1996년은 대한페인트·잉크가 창립 반세기를 넘어 초일류기업으로 발돋움하는 원년이었다. 대한페인트·잉크가 1996년 1월 1일 기업상(비전), 경영이념, 노루인의 정신, 바람직한 인재상 등 네 가지 항목으로 구성된 기업문화상(企業文化像)을 제정·공포한 이유다. 당시 제정한 기업상은 ‘21세기 색채산업을 선도하는 종합화학회사’로, 하위 항목은 ‘신제품 개발 속도, 생산 속도, 제품 이송 속도’가 신속한 ‘발 빠른 회사’, ‘고객만족, 사원만족, 사원가족만족’을 모두 포함하는 ‘맘에 드는 회사’로 정했다. 경영이념은 ‘기술제일, 인간존중, 환경사랑’으로, 그동안 대한페인트·잉크가 추구해왔던 핵심가치를 포함했다. 또 ‘고객과 함께한다’, ‘새롭게 도전한다’, ‘미래를 창조한다’로 갈무리된 노루인의 정신에는 새로운 반세기를 향한 미래 지향적 가치를 담았다. 바람직한 인재상 실현을 위한 세 가지 인재요건도 마련했다. 첫째, ‘미래에 도전하는 행동인’은 스스로 문제를 찾아 새로운 목표에 도전하는 개척정신, 적극적이고 추진력 있는 행동인, 혁신적인 사고와 풍부한 창조정신을 갖춘 인재를 의미했다. 둘째, ‘책임감이 강한 전문인’은 자기 분야에서 최고를 지향하는 프로 기질과 전문 능력, 예리한 판단 능력과 유연한 상황 대응력, 자기가 맡은 일에 책임을 다하는 자세를 겸비한 인재를 의미했다. 셋째, ‘전체를 생각하는 조직인’은 개성 존중과 팀워크의 발휘, 신뢰성을 바탕으로 더불어 일하는 자세, 고객과 사회에 대한 사명감을 내재화한 인재를 의미했다. 대한페인트·잉크가 이때 정립한 기업문화상은 2005년 1월 새로운 비전과 경영이념이 선포될 때까지 10년간 대한페인트·잉크의 정신적 구심점이자 구성원들이 나아갈 좌표로 기능했다.

기업문화상 제정·공포와 함께 신인사제도에 기반한 경영혁신도 추진했다. 1996년 1월 1일을 기해 도입한 신인사제도는 기존 연공주의 인사제도의 한계와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개인의 능력과 성과를 객관적으로 파악해 적절히 보상하는 능력주의를 지향했다. 또 도전의식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인재를 높이 평가하고 각 개인의 적성과 잠재력을 극대화함으로써 구성원의 생산성과 업무 만족도를 높이고, 대한페인트·잉크가 추구하는 인재상과 인간존중의 이념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특히 신인사제도는 첫째, 개인존중의 능력개발 시스템 구축, 둘째, 능력과 업적에 따른 처우 및 보상체계의 정립, 셋째, 직속 상사 중심의 인적 자원관리, 넷째, 자율과 창의가 살아 있는 진취적 조직문화의 창달 등 네 가지 기본방향을 지향했다. 직급 및 승격제도, 임금제도, 평가제도의 혁신도 이 같은 기본방향에 맞춰 이루어졌다. 먼저 기존의 부·과 중심의 부서제 대신 중간단계가 없어 명령체계가 간단하고 의견 개진이 자유로워 창조적 아이디어 창출이 가능한 팀제를 도입하고, 조직 또한 54팀(실), 4그룹(부문), 1연구소 체제로 전면 개편했다. 대한페인트·잉크는 이를 기반으로 1999년 1월부터 과장급 이상 구성원에 연봉제를 적용했다.

5.경영시스템 선진화와 전산화 추진

1990년대에 이루어진 대한페인트·잉크의 경영혁신은 앞서 한영재 사장의 취임 이후로 계속돼온 경영시스템의 선진화에서 비롯됐다. 그때부터 차근차근 업무혁신과 업무 전산화를 추진해온 대한페인트·잉크는, 먼저 1988년 12월 1일 새로운 경영관리기법인 ‘목표관리제도’를 도입했다. 목표관리제도는 회사 전체의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세분화해 회사의 모든 조직과 개인에게 할당함으로써 목표 달성 및 성과 향상을 도모하는 것으로, 사내에 성과주의, 능력주의를 확립하고 전 구성원의 계획적·자발적 업무 추진을 활성화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조직간 원활한 의사소통과 우수 인재 양성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후 1991년 8월부터 연말까지 사무직 부문의 업무처리 간소화와 표준화를 추구하는 ‘관리혁신(MI, Management Innovation)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한편, 1995년에는 새로운 원가관리기법인 ABC시스템을 도입했다. ABC시스템은 그간 적당히 배분해오던 감가상각비 등의 간접비를 생산공정별로 정확히 나누어 부가하는 방식으로, 이를 도입하기 위해선 손익이나 제조공정에 관한 정보 전산화가 선행되어야 했다. 대한페인트·잉크는 이를 위해 1년여의 전산화 과정을 거쳐 1996년 ABC시스템을 실무에 도입했다.

경영혁신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전산의 고도화 작업도 추진했다. 대한페인트·잉크는 1984년 1차 MIS 추진을 통해 축적한 경험을 바탕으로 1989년 2차 MIS 실행에 돌입했다. 먼저 관리의사결정시스템(DSS, Decision Support System)을 도입, 관리자들을 위한 정보 서비스를 강화했다. 또 기업환경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전략적 정보의 필요성이 확대되던 1990년 11월에는 KIS-LINE을 SIS추진본부에 설치, 운영을 시작했다. KIS-LINE은 한국신용평가에서 증권감독원, 대한상공회의소 등 국내 유관기관의 협조를 받아 구축한 종합 데이터은행으로 국내 경제, 금융, 산업 및 기업 관련 정보를 총망라해 제공하는 경영전략정보시스템이다. 1993년에는 국내에서 두 번째로 IBM 메인 프레임에서 운용하던 MIS시스템을 클라이언트/서버 기반으로 다운사이징했다. 이후 1999년 인터넷 시대가 본격 개막함에 따라 MIS시스템을 웹기반으로 재구축하고, 지식경영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정보시스템 인프라를 업그레이드했다.

6.기술중심·품질중심을 구현한 기술연구소의 독립

기술중심, 품질중심은 대한페인트·잉크가 창립 당시부터 추구해온 경영이념으로, 1988년 12월 1일 이루어진 기술연구소의 완전 독립은 이를 더욱 가속화했다. 당시 산업의 고도화와 신소재의 출현으로 산업용 특수도료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면서 첨단도료의 개발이 시급한 상황이었는데, 때마침 기술부로부터 독립한 기술연구소는 도료와 잉크의 주원료에 대한 제원을 확립하는 기초연구와 신제품 개발에 집중하는 응용연구에 매진,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뤘다. 1991년부터 2000년까지 총 51건의 도료 특허를 출원, 니폰페인트, 롬 앤드 하스 등에 이어 세계 5위를 차지하는 실적을 올린 것이다. 1989년 컴퓨터조색시스템(CCM, Computerized Color Matching System), 정밀분석기기, 기술정보 데이터베이스 등 첨단 연구시설을 도입해 연구·개발 인프라를 강화한 게 주효했다.

기술연구소의 첨단도료 개발은 산업용 특수도료와 환경친화적 도료에 집중됐다. 1992년 섭씨 800도에 견디는 내열도로를 개발, 인공위성 ‘우리별 1호’의 태극마크 등 외부 표지물 도장에 사용했고, 1994년 2월에는 인체에 무해하면서도 살균 효과가 탁월한 고기능성 항균페인트 ‘안티바’를 개발했다. ‘안티바’는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에서도 극소수 업체만 시판하는 첨단도료였다. 1995년 3월에는 말레이시아 레버텍스사에 절연바니시 생산기술을 수출, 최초로 해외에 기술을 수출하는 성과를 거뒀고, 4월에는 도장공정 단순화, 작업환경 개선, 비용절감 등의 강점을 보유한 건축 내외장재용 ‘쎈코트’ 도료를 개발했다. 대한페인트·잉크의 ‘국내 최초’ 타이틀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1995년 7월에는 셔윈 윌리엄스사와의 기술제휴를 통해 국내 최초 아크릴-우레탄 수지 골격의 무공해 환경보전형 양이온 전착도료를 개발해 시판에 들어갔고, 1996년 5월에는 오염 제거용 수성페인트 ‘크린텍스’가 국내 최초 기술임을 인정하는 NT마크를 획득했다. 1997년 6월 국내 최초로 개발한 저오염성, 고내후성 외부용 수성페인트 ‘슈퍼텍스’는 미국특허까지 출원했다. 이외에도 1996년 5월 발광효과와 내구성이 뛰어나고 인체에 무해한 축광페인트를 국내 최초 독자 기술로 개발했고, 12월에는 실내 및 가구소품 등을 소비자가 직접 칠할 수 있는 인테리어 전용 스프레이 페인트를 개발, 가정용 DIY 페인트의 새 장을 열었다. 1997년 3월에는 국내 최초 100% 수용성 페인트 ‘데코피아’, 5월에는 고급차 및 외제차 보수용 도료 ‘그린 크리어’를 개발했다. 또 6월에는 초기 발수성이 우수한 유성 발수제 ‘레인키퍼’를, 7월에는 계열사인 아이피케이가 완전 무독성 방오도료 ‘인터슬릭’을 개발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20년 이상 변하지 않는 내후성을 지닌 불소수지도료 ‘오래플론’을, 11월에는 국내 최초 타일 전용 페인트 ‘크린타일’을 개발했다. 이외에도 1998년 12월에는 섭씨 800~1,000도의 고열에서도 견딜 수 있는 내화도료 ‘화이어블로킹’을 개발해 국내 특허를 획득했다. 1999년 1월에는 국내 최초로 우레탄수지를 골격으로 하는 외장용 도료 ‘아르미’와 무독성 ‘칠박사’ 에나멜도료를 개발해 상품화했다. 또 6월에는 친환경 도료인 하이솔리드계 아크릴수지 특허권을 획득한 데 이어 자동차 보수용 일반철재와 목재용으로 사용되는 불포화 폴리에스테르 타입의 퍼티 개발을 완료했다.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해온 자동차 보수용 퍼티를 국산화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 같은 대한페인트·잉크의 기술중심, 품질중심 신제품 개발은 고객만족 제일주의 정책의 실현으로 이어졌다. 특히 대한페인트·잉크가 1997년 11월 국내 최초로 개발한 자동조색시스템은 컴퓨터에 구축된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해 색상을 자동으로 맞추는 시스템으로, 이 시스템을 생산라인에 도입함으로써 제조비용 절감, 납기 단축, 소량 주문에 대한 효율적 대응, 생산성 증대의 동력이 되었다.

7.시장 지형적 영업체제와 소비자 중심의 마케팅

1990년대 도료산업의 가장 큰 변화는 공급자 주도형 시장에서 구매자 주도형 시장으로의 전환이었다. 대한페인트·잉크는 이 같은 변화에 발맞춰 시장 지향적 영업체제를 구축하고 소비자 중심의 마케팅을 실현해 나갔다. 1990년 1월 현재 대한페인트·잉크의 지방 판매조직은 서울사무소 외에 7지점(부산·광주·대전·포항·대구·마산·원주), 4영업소(울산·전주·순천·강릉), 신설 아산연락사무소 체제였는데, 이후 지방 판매조직을 지속 확대하는 방향으로 영업조직을 정비해 나갔다. 이 같은 기조는 1998년 IMF 외환위기 사태로 지방 판매조직을 대거 폐쇄해 서울·당진·강릉 3영업소 체제가 될 때까지 계속 유지됐다. 한편 대한페인트·잉크는 1997년 3월 29일 대지 350평 연면적 300평 규모의 대구사옥을 완공했다. 대구사옥은 물류센터 기능을 갖춘 복합시설로 설계돼 기능성 제품 판매 제고에 기여했다.

소비자 중심의 다양한 마케팅 전략을 적극 추진, 색채산업 선도기업으로서의 기반을 마련한 것도 이때다. 대한페인트·잉크는 1991년 ‘제품을 판매하기 전에 회사를 판매하라’, ‘제품의 선택은 회사를 선택하는 것임을 명심하라’, ‘회사의 이념과 철학을 판매하라’, 이렇게 세 가지 내용의 슬로건을 ‘소비자 중심 영업의 기본전략’으로 내걸었는데, 이는 앞으로 고객만족경영에 보다 중점을 두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이에 따라 마케팅 전략 역시 기업 이미지 제고와 입체적 고객 서비스에 초점을 맞췄다. 그 대표적인 예가 창립 50주년을 맞은 1995년과 그 이듬해 집중 방영된 기업 이미지 광고, 적극적·입체적 고객 서비스의 일환인 도장기술학교다. 특히 첨단 컴퓨터 그래픽 기법을 활용해 제작한 텔레비전 광고 ‘우주탐험편’은 광대한 우주공간을 배경으로 페인트가 만들어낼 수 있는 최상의 자연색을 선명하게 표현해 화제를 모았다. 1994년 8월 자동차보수용 도료 취급 대리점과 도장기술자를 대상으로 안양공장 내에 개설한 도장기술학교 역시 좋은 반응을 얻었다. 대한페인트·잉크의 자동차보수용 도료를 소개하고 올바른 사용법과 도장 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 해결방안 등을 교육했는데, 경력에 따라 일반과 상급으로 구분, 1박2일에서 4박5일 코스로 진행했다. 1997년 6월에는 부산공장에도 대한도장기술대학을 개원하는 등 1994년 8월부터 2004년 11월까지 총 160기, 1,045명의 인원을 교육하며 국내 도장기술자의 역량 제고에 기여했다.

이외에도 다양한 주거공간 색단장 캠페인을 전개해 업계 선도기업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다. 1995년 3월부터 구로구 부녀복지관에서 개최한 ‘주부 초청 집 단장 요령 공개 강좌’, 1996년 3월 초등학교와 아파트 단지 놀이터를 대상으로 한 ‘봄맞이 놀이터 새 단장 캠페인’ 등이 대표적 사례다.

8.컬러와 디자인, 기술을 넘어 감성의 언어로

대한페인트·잉크가 ‘컬러’의 힘과 가치에 주목한 건 1980년대 후반부터다. 1987년 도료업계 최초로 색채연구실’을 개설, 기술 중심의 도료를 컬러에 기반한 감성의 언어로 승화시켰다. 자동차·가전 등 생활제품과 건축 분야의 컬러 연구를 시작했고, 당시 찾아보기 힘든 다양한 색채문화 선도 활동도 전개했다. 1991년 국내 최초 색채 전문 교양지 <색사랑> 창간, 국내 최초 <한국표준색표집> 발간 참여, 1990~1992년 ‘한국의 사계’, ‘한국인의 숨결’ 등을 주제로 개최한 자동차 컬러 연구개발발표회, 1994년 11월 ‘한국인의 손길’을 주제로 연 제7회 색채발표회, 1997년 <1997 건축색채디자인 실적 사례집> 제작·보급 등이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1997년 세계 페인트업계 최초로 색채 기획 프로그램을 개발해 CD롬으로 제작·보급하는 한편, 1999년에는 <2000~2001 건축환경색채 트렌드 칼라북>을 개발·보급하는 등 국내 컬러 비즈니스 분야에서 선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대한페인트·잉크의 활발한 색채 탐구는 2000년대에 ‘브랜드’와 ‘컬러’, ‘디자인’을 연계한 다양한 활동으로 이어졌을 뿐 아니라, 컬러전문기업으로서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데도 기여했다. 2001년 색채연구실을 디자인센터로 개편하고, ‘기업 이미지 차별화, 고부가가치 신상품 개발, 품질 경쟁력 강화’와 연결한 색채·제품·비주얼·광고·멀티미디어 디자인 개발 시스템을 구축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는 2001년 10월 한국능률협회컨설팅과 KMA디자인경영위원회가 주관하는 국내 최고 권위의 제1회 대한민국디자인경영대상 활동사례부문 우수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이후 디자인센터는 2014년 NSDS(NOROO Seoul Design Studio)로 명칭을 변경하고 컬러 컨설팅과 NCTS(NOROO International Color Trend Show) 개최를 총괄하는 등 문화적 영향력을 확장했다. 또한 2014년 12월 출범한 노루팬톤색채연구소(NPCI, NOROO-PANTONE Color Institute), 2019년 9월 설립한 노루밀라노디자인스튜디오(NMDS, NOROO Milano Design Studio)와 글로벌 색채 네트워크를 구축, 긴밀한 협력을 이어 나갔다.

9.자금성 도장공사와 중국시장 진출 본격화

1992년 이루어진 한국과 중국의 국교 수립은 국내 기업들의 중국시장 진출을 가속화했다. 대한페인트·잉크 역시 꾸준히 중국 진출 기회를 모색한 결과, 1993년 처음으로 삼성물산 정밀화학팀을 통해 산동성 연태에 피아노 도료 18톤을 수출하는 데 성공했다. 현지 상황에 익숙지 않아 아쉽게도 1회성 거래에 그쳤지만, 충분히 의미 있는 성과였다.

대한페인트·잉크의 중국 진출이 본격화한 건 1994년 9월, 베이징 소재 병원에 외벽용 플렉스코트 1컨테이너를 판매하면서부터다. 그해 10월 대한페인트·잉크 기술진이 도장공사 기술지도 감리를 위해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현지 딜러의 소개로 고궁박물원(자금성)과 접촉할 기회를 얻은 것이다. 당시 고궁박물원은 1995년 10월에 있을 개원 70주년 기념행사를 위해 보수 도장 공사를 추진 중이었는데, 기존에 의뢰했던 미국·독일·일본 기술진이 모두 난색을 표하며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해왔다면서 대한페인트·잉크에 가능성을 타진해왔다. 대한페인트·잉크는 고궁박물원 측에 네 가지 타입의 도료를 추천하는 한편, 1994년 11월 중국 내 영국 합작사 2개 업체와 경쟁 하에 자금성 외벽 샘플 도장을 실시했다. 그 결과 자금성 도장업체로 최종 선정된 건 대한페인트·잉크였다. 영국 합작사의 경우 페인트 도막이 떨어지는 도막박리 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후 대한페인트·잉크는 1995년 7월 12일 안양공장을 방문한 중국 고궁박물원 대표단과 수주계약을 체결했다. 주문 물량은 700만㎡, 18리터들이 19만 1,000통으로, 단일 건축물의 도장 물량으로는 최대 규모였다. 1995년 7월 시작한 자금성 도장은 대한페인트·잉크의 엄격한 감독 아래 성공리에 마무리됐다. 공사를 지켜본 고궁박물원 측에서 기술진의 꼼꼼함에 감동해 감사 인사를 전해왔을 정도다.

자금성 도장은 대한페인트·잉크의 탁월한 기술력을 대내외에 입증했을 뿐 아니라, 중국 최고의 문화유산을 한국제품으로 보수 관리함으로써 노루표페인트가 중국 진출 교두보를 확보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대한페인트·잉크는 그 여세를 몰아 1996년 12월 10일 베이징에 첫 번째 대리점을 개설했다. 또 1997년 3월에는 칭따오(청도)에 중국사무소를, 8월에는 칭따오, 다롄(대련), 옌지(연길), 선양(심양)에 대리점을 개설, 공업용 도료 직거래선을 개척했다.

10.분사 전략으로 경영 효율화 추진

1980년대 대한페인트·잉크가 추진했던 도료 아이템별 전문화·자동화 시스템 구축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창의적 선택과 집중’에 의한 분사전략으로 진화·발전했다. 이는 외형의 신장보다 집중해야 할 시장과 품목을 선별해 수익을 제고하는 전략으로, 업종별 전문화와 틈새시장 개척을 가속화하려는 한영재 사장의 경영방침에 따른 것이었다. 이를 토대로 ‘2000년대 초우량 기업을 향한 사업방향’도 정립했다. 그 내용은, ‘첫째, 분사전략을 통해 선진 도료업체와 대등한 기술 수준을 확보하고 고기능성 도료 중심의 틈새시장을 개척하는 등 시장 변화에 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마케팅 능력을 확보한다’, ‘둘째, 도료별로 확보한 선진기술을 바탕으로 세계로 눈을 돌려 선진 메이저 업체와 합작 등의 방법으로 중국 및 동남아 시장에 공동 진출하여 해외 생산기반을 구축하고 이를 바탕으로 해외 마케팅을 적극 추진한다’였다. 꾸준히 기술을 갈고 닦아 글로벌 톱티어 수준의 기술력을 확보함으로써 해외시장 진출을 가속화하겠다는 의지가 분사전략에 내재돼 있었던 것이다.

대한페인트·잉크의 첫 분사 대상은 프라스틱사업부였다. 1989년 1월 자동차 범퍼 및 인스트루먼트 패널 금형을 국내 최초로 개발하는 등 사업 규모가 점차 확대됨에 따라, 대한페인트·잉크는 1989년 2월 28일 프라스틱사업부의 별도 법인 독립을 추진했다. 전문성 제고와 경쟁력 강화를 위한 선택이었다. 이에 따라 1989년 7월 1일 주식회사 프라코(Plastic Korea)가 정식 출범했다. ㈜켐코의 설립도 1989년 7월에 이루어졌다. 대한페인트·잉크의 목공용 도료와 신나 임가공 제품을 생산하던 켐코는 1995년 대한페인트·잉크의 목공용도료팀을 흡수, 기능성 페인트부문에서 꾸준한 성장세를 기록했으며, 2001년 7월 ㈜씨케이페인트로 회사명을 변경했다. 1990년 6월에는 플라스틱 및 진공중착용 도료 전문기술 보유사인 일본 니폰비케미칼(Nippon Bee Chemical Co., Ltd.)과 50대 50 합작으로 대한비케미칼을 설립했다. 대한비케미칼은 설립과 동시에 기아자동차 아산공장과 소하리공장, 아시아자동차, 쌍용자동차 등에 자동차 범퍼 및 부품용 도료를 공급했고, 2002년에는 국내 최초로 미국 빅3 자동차 메이커의 품질요구 수준을 만족시키는 ISO/TS 16949 인증을 획득했다. 종합 물류기업 대연(現 노루로지넷)을 설립한 것도 이 시기다. 대한페인트·잉크가 1991년 7월 설립한 대연은 유통, 화물운송, 창고, 노무용역 등 물류 전반을 총괄 담당하는 자회사로, 1999년 7월 업계 최초로 로지넷(Loginet)을 활용한 21세기 미래형 물류 서비스를 도입했다. 1992년 2월에는 엔지니어링사업부를 신설 계열사인 세다의 설비사업부로 흡수해 화학 플랜트, 도장설비, 공장 자동화사업을 개시했다. 세다는 엔지니어링사업부가 네덜란드 HEK사와 체결한 모바일 플랫폼 건설장비에 관한 기술제휴를 토대로, 자동화 공장을 위한 제어시스템, 생산 기술 관련 데이터 관계 시스템 등 종합적 기술 서비스를 제공했다.

1994년에는 두 개의 굵직한 기업을 분사했다. 2월에는 전산실을 분사하는 형태로 ㈜디아이티를 설립, 정보통신 분야에 신규 진출했다. 디아이티는 ERP(Enterprise Resource Planning) 구축, 웹 사이트 및 인트라넷 구축 등 정보통신 관련 핵심 서비스를 제공하는 시스템통합(SI) 업체로 성장했으며, 1998년 국내 최초의 인터넷 취업 포털인 ‘잡 링크(Joblink)’를 시작으로 HR(Human Resource) 전문기업으로 진화했다. 4월에는 잉크사업부를 분리해 대한잉크㈜를 출범시켰다. 대한잉크는 2002년 10월 프린터용 잉크 ‘디어테크’를 출시하고 컴퓨터 프린터 리필잉크사업에 본격 진출했는데, 디어테크는 저가와 물량 위주의 리필 잉크시장을 고급화하는 데 기여했다.

1989년 이후 꾸준히 추진돼온 대한페인트·잉크의 분사정책은 ㈜대한자동차도료(DAC, Daihan Automotive Coatings Co., Ltd.)의 설립으로 정점을 이뤘다. 대한페인트·잉크는 니폰페인트와 1995년 11월 1일 창립 50주년 기념행사에서 자동차용 도료와 첨단 도료를 전문 생산하는 합작회사를 한국에 설립하기로 합의하고 1996년 1월 대한자동차도료를 출범시켰다. 출범 이후 대한자동차도료는 국내는 물론 미국·일본·유럽에도 판매 거점을 확보해 수출에 적극 나서는 한편, 자동차 외장 분야의 처리제 및 도장 엔지니어링 기술개발에도 힘썼다. 거래선 역시 기아자동차를 시작으로 삼성자동차, 대우자동차(현 GM코리아), 현대자동차로 계속 확대해나갔다. 또 신제품 개발에도 박차를 가해 내산성·내후성 등이 뛰어난 자동차 상도용 기능성 도료(1997.06), 저온 전착도료(1998.09), 환경대응형 수용성 상도도료(2001.09, 2CIB Base) 등의 개발 성과를 이어갔다. 2001년 1월 ㈜디에이씨, 2004년 12월 ㈜DAC로 회사명을 변경한 대한자동차도료는, 2010년 5월 ㈜노루오토코팅으로 회사명을 변경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1.IMF 외환위기 극복과 창업주 한정대 회장의 영면

1990년대 중반 대한페인트·잉크는 두 가지 위기에 봉착한다. 첫 번째는 안양공장에 발생한 불의의 화재, 두 번째는 IMF 외환위기였다. 안양공장 화재는 1996년 7월 18일 밤 10시 30분에 발생했다. 제품창고와 원료창고의 전기 누전이 원인이었다. 피해액은 상당했다. 안양공장에 보관 중이던 모든 제품과 원료가 한꺼번에 소실돼 수백억 원대에 이르는 직·간접 피해액이 발생했다. 대한페인트·잉크는 즉시 비상경영체제를 선포하고 전 임직원이 합심해 1일 2교대 비상근무체제에 돌입했다. 이 같은 노력 덕분에 6개월 이상 걸릴 것이라 예상했던 복구작업을 단 2개월 만에 완료할 수 있었다. 대한페인트·잉크의 이런 저력은 1996년 경영실적에도 반영됐다. 매출액은 전년 대비 5.2% 증가한 1,647억 원, 당기순이익은 2배 늘어난 18억 원을 기록했다.

그러나 안양공장 화재를 이겨낸 지 1년 만에 찾아온 IMF 외환위기는 훨씬 심각한 위기 상황을 초래했다. 대한페인트·잉크의 위기가 가시화된 건 최대 거래선인 기아자동차가 1997년 7월 부도에 이어, 10월 28일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부터다. 기아자동차 도료 사용량의 90%를 공급하던 대한자동차도료가 먼저 자금압박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이는 곧 그룹 전체로 확산됐다. 안양공장의 화재 시설복구자금 대출로 부채비율이 360%에 달한 상태에서 공장 가동률까지 절반 이하로 떨어져 어려움은 더욱 가중됐다. 그 결과 1997년 경영실적은 총매출액 1,749억 원, 당기순손실 8억 원을 기록했다. 이런 상황에서 도료산업의 불황마저 극심해졌다. 한국페인트잉크공업협동조합 회원사 기준으로 1998년 도료 생산량은 49만 6,017킬로리터, 1997년 대비 28.5%나 감소한 수치였다. 금리와 환율이 폭등하고 금융기관의 대출금 회수 요청이 잇따르는 최악의 위기 상황에서 대한페인트·잉크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방향의 경영위기 극복을 위한 노력을 계속해나갔다.

먼저 강력한 인력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명예퇴직제도 도입, 임금 동결, 복리후생비 축소만으로는 위기를 극복하기 어렵다는 데 노사가 인식을 같이한 결과였다. 이에 따라 1,080명이던 임직원 수가 한때 650명 선까지 줄어들었다. 둘째, 재무구조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다각도의 노력을 기울였다. 순차적으로 400억 원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하여 자금을 확보하고 여신 금융기관의 차입금 조기 상환 요청에도 적극 대응했다. 셋째, 그룹 사장단 회의를 통해 정보를 공유하고 시급한 현안에 공동 대응했다. 당시 한정대 회장은 와병 중임에도 자금 집행을 직접 관리하며 임직원의 위기의식을 고취했다. 넷째, 긴축경영을 통해 운영비를 절감했다. 서울 여의도 임차 사무소를 폐쇄한 데 이어 전국 지방 지점 및 영업소를 통폐합해 경비 절감을 꾀했다.

이 같은 노력 끝에 대한페인트·잉크는 조금씩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1998년 총매출액 1,740억 원, 당기순이익 23억 원을 기록한 데 이어, 1999년에는 총매출액 1,944억 원, 당기순이익 95억 원, 영업이익 183억 원을 기록했다. 재무구조도 크게 개선됐다. 1997년 360%에 달했던 부채비율이 1999년에는 80%로 대폭 줄어들었고, 사내 유보율도 2000년 6월 말 현재 572%에서 1,421%로 3배 가까이 늘어났다. 두 번의 연속된 경영위기를 극복하고 어떤 위기에도 흔들리지 않는 탄탄한 기업으로 체질을 개선한 것이다.

이렇게 대한페인트·잉크가 경영위기 극복에 매진하던 1998년 11월 22일, 창업자 한정대 회장이 79세의 나이로 영면에 들었다. 대한페인트·잉크는 빈소를 삼성서울병원 영안실에 마련하고, 회사장으로 장례식을 치렀다. 많은 국내외 기업인과 관련 인사가 빈소를 찾아 우리나라 페인트·잉크산업을 개척해온 고인의 업적을 기렸다. 국내 유수의 일간지들 역시 ”기업은 소유나 부에 목적을 두어서는 안 되며 국가와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하는가에 의의를 두어야 한다”는 신념을 평생에 걸쳐 실천했던 위대한 거인을 추모하며 고인이 걸어온 길을 되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