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해방과 함께 시작된 NOROO의 역사는 한정대 선대회장의 ‘나의 조국을 위하여’라는 창업정신에 기반한 것이었다. 창업주는 1945년 10월 ‘대한오브세트잉크’를 창립해 인쇄잉크 제조사업에 뛰어들었고, 국내 최초로 흑잉크를 개발해 조국의 문화교육과 출판산업의 부흥을 선도했다. 6·25전쟁 중에는 지폐용 인쇄잉크를 공급해 국가 재건에 기여했고, 종전 후에는 도료사업에 진출해 국가기간산업 육성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국가 경제부흥에 이바지할 수 있는 제조업에 투신, 곧 ‘사업보국(事業報國)’의 철학을 실현한 것이다.
1.한정대 선대회장의 큰 뜻
노루그룹의 창업자 한정대 선대회장은 함경남도 함흥 출신으로, 1920년 11월 2일 부친 한승진 공과 모친 임창운 여사의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한 회장에게 큰 영향을 미친 두 개의 사건이 있는데, 그 첫 번째가 일제의 조선인 독립운동 탄압자금 ‘15만원 탈취 사건’의 주역인 외삼촌 임국정 의사의 순국이다. 임국정 의사는 거사를 통해 마련한 돈으로 항일무장투쟁에 필요한 무기를 구입하려다가 밀정의 밀고로 체포돼 1921년 8월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27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이는 한 회장의 외가와 모친인 임창운 여사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을 뿐 아니라, 한 회장의 집안 전체가 일제 강점기 내내 독립투사의 일가라는 멍에를 지고 숨죽여 살아가는 계기가 됐다. 두 번째는 함흥고등보통학교 학생회장으로 교내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던 11살 위 형 정빈의 죽음이다. 큰아들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부친은 이 모든 걸 학교교육 탓이라 여기고 차남인 한 회장을 상급학교에 진학시키지 않았다.
보통학교를 마친 한 회장은 이후 일본인 의복상점에 취업해 3년간 점원으로 성실하게 일하며 주인의 신임을 받았다. 그 과정에서 훗날 독자적 사업 추진의 기반이 된 치밀한 상술을 익히는 한편, 일본 상급학교 진학의 기회도 얻게 됐다. 1941년 3월 오사카공업고등학교 응용화학과를 졸업한 한 회장은 후지화학연구소에 취업, 훗날 잉크 회사 창업에 필요한 경험을 쌓았고, 1945년 해방을 맞아 조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조국에서의 앞날을 고민하던 25살 청년 한정대는 당시 동아일보 편집국장이던 외사촌 형 임병철을 만나 “지금 시급한 건 문화교육과 출판이며 출판은 잉크 없이는 안 된다”는 조언을 듣고, 인쇄잉크 제조사업에 뛰어들기로 결심한다. 자신의 전공을 살려 당시 공급난에 시달리던 인쇄잉크를 제조해 조국에 이바지하겠다고 다짐한 한 회장은 ‘사업보국(事業報國)’을 사업철학으로 삼아 큰 뜻을 펼쳐나갔다. 그는 “기업은 사소한 이익보다 국가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보다 큰 목표를 지향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기업인은 국가 경제부흥에 이바지할 수 있는 제조업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이는 훗날 노루의 창업정신인 ‘나의 조국을 위하여’로 계승되었다.
2.‘사업보국’을 위해 ‘대한오브세트잉크’ 창업
인쇄잉크 제조업에 투신하겠다는 한정대 선대회장의 결심은 빠른 실행으로 이어졌다. 우연히 회현동 골목을 지나다가 낡은 일본식 목조가옥을 발견한 한 회장은 ‘바로 여기다’라는 생각에 곧바로 건물 주인을 찾아갔다. 당시 일본인 건물주는 한 회장에게 한 가지 부탁만 들어주면 건물을 무상으로 양도하겠다고 제안했다. 부탁은 간단했다. 만주로 시집간 딸이 찾아오면 자신이 남긴 편지와 물건을 전해달라는 것이었다. 그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 한 회장은 2년 후 찾아온 일본인 건물주의 딸에게 약속대로 편지와 물건을 전해주었을 뿐 아니라, 그녀가 가족이 있는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필요한 도움을 아끼지 않았다. 어떠한 경우에도 약속과 신의를 지키는 걸 최우선으로 여겼던 한 회장의 면모가 잘 드러나는 일화다.
한 회장은 이렇게 마련한 작은 목조건물에 ‘대한오브세트잉크’라는 간판을 내걸고 인쇄잉크사업을 시작했다. 1945년 10월의 일이었다. 회현동 1가 34-4의 대지 33.1평과 31-4의 대지 7.1평에 위치한 6.7평 규모의 사무실 한 채와 27평 규모의 창고 한 동은 해방 후 한국인이 설립한 최초의 잉크제조회사의 핵심 근거지였다. 회현동 공장은 당시 잉크 소매상들이 밀집한 을지로 2~3가와 가까워 입지 면에서도 최적의 선택이었다. 이후 한 회장은 제대로 된 회사 체계를 갖추기 위해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의 전신)에 다니던 임병철의 조카 임영수 등을 직원으로 채용했고, 생산 설비 마련과 초기 운영에 필요한 자금 조달에도 힘썼다.
임병철의 소개로 조선은행 영업부 김영찬 지배인을 찾아간 한 회장은 ‘사업보국과 국가재건’이라는 대한오브세트잉크의 창업 목적과 자신의 소신을 설명한 후 50만 원의 대출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럴 듯한 담보도 번듯한 사업장도 없는 탓이었다. 하지만 한 회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거듭 조선은행을 찾아가 ‘조국을 부강하게 할 뜻 깊은 사업’에 대한 그의 열정과 포부를 역설했고, 결국 50만 원의 융자를 받아 인쇄잉크 제조사업을 본격화할 수 있었다.
3.기술력으로 써 내려간 ’최초’의 기록들
대한오브세트잉크는 해방 후 한국인이 설립한 최초의 잉크제조회사였다. 한정대 선대회장이 회사 이름 앞머리에 ‘대한’을 붙인 것도 ‘이 나라 최고의 잉크회사를 만들겠다’는 포부에서였다. 실제로 대한오브세트잉크는 최초의 국산 잉크 생산, 국내 최초 안료 개발 같은 숱한 ‘최초’의 기록을 써 내려갔고, ‘사업보국’의 철학과 품질제일주의를 견지하며 국내 인쇄잉크 업계를 선도했다.
그러나 최초의 국산 잉크 생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인쇄잉크는 수지를 끓여 만든 바니시에 안료를 섞고 이를 분산시켜 만드는데, 그러려면 수지를 끓일 가마솥, 안료와 수지를 혼합할 교반기, 안료와 수지를 분산하는 분산기가 필요했다. 한 회장은 수지를 끓일 솥은 욕실용 대형 놋쇠 솥을, 혼합기는 드럼통을 이용하기로 하고, 분산기 1대만 고물상을 뒤져 구입했다. 문제는 잉크 생산에 돌입한 이후 발생했다. 식물용 기름을 주로 사용하는 바니시는 악취가 심한 데다 화재 위험이 높았고, 안료는 미 군정청의 배급량이 적어 늘 원료난에 시달려야 했다. 분산기를 24시간 가동해도 생산할 수 있는 잉크는 소량에 불과했다. 게다가 잉크 생산 시 발생하는 악취와 먼지, 모터 소음에 항의하는 인근 주민들의 반발 또한 거셌다. 결국 한 회장은 한강 뚝섬의 야채밭에 수지 끓이는 솥을 설치하고 여기서 만든 바니시를 자전거로 회현동 공장까지 운반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판매 역시 쉽진 않았다. 국산 잉크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견본을 사용해본 인쇄소들의 호평이 이어지면서 서울 시내 거의 모든 인쇄소의 주문이 쇄도했고, 1945년 12월 10일 조선은행권 인쇄를 계기로 기술력까지 인정받으면서 국정교과서와 관공서 인쇄물에도 대한오브세트잉크 제품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인쇄잉크 수요가 계속 늘어나면서 원료 수급 문제가 업계의 주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미군정청에서 배급하는 적은 양의 원료만으로는 늘어나는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한 회장은 일본 후지화학연구소 시절의 경험을 되살려 안료를 직접 제조하기로 마음먹었다. 남대문시장과 부산을 오가며 화공약품 원료를 사 모은 한 회장은 안료 시험제조에 착수, 마침내 황색안료와 청색안료를 제조하는 데 성공했다. 1947년에는 녹색안료까지 개발, 업계 최초로 국산 녹색잉크를 사용해 ‘무100원권’을 발행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는 대한오브세트잉크의 품질 공신력을 높였을 뿐 아니라, 판매 증가로도 이어졌다. 한정대 선대회장이 창업 초기부터 고수해온 ‘최고의 제품을 만든다’는 원칙과 품질제일주의, 사업보국의 정신이 맞물린 결과였다.
4.예기치 못한 두 가지 시련
사업이 한창 활황이던 1949년 12월, 대한오브세트잉크는 예기치 못한 큰 시련에 직면했다. 길 건너 대성목재에서 일어난 불이 대한오브세트잉크까지 번진 것이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었으나 생산설비와 제품 등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했다. 4개월여의 복구작업 끝에 1950년 4월 9일, 새 공장의 상량식을 개최하고 각종 설비를 새로 구입·설치해 생산을 재개했지만, 오래지 않아 6.25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초반, 한정대 선대회장과 직원들은 피난을 떠나지 않고 있다가 9.28 수복과 함께 생산을 재개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1.4 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대량으로 구입해 놓았던 원료와 기계 등을 임시 수도인 부산으로 옮기는 한편, 한정호, 임영수, 한희동 등과 함께 사업을 재개할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군비 충당을 위해 정부가 부산에 임시로 인쇄공장을 세우고 한국은행권을 자체 발행하기로 한 것이다. 이때 한국은행은 대한잉크에 인쇄잉크 공급을 요청하는 한편, 한정대 회장을 재무부 직할 인쇄공장 기술 촉탁에 임명했다. 한 회장은 오직 국가재건에 기여하겠다는 마음으로, 한국은행권이 차질 없이 발행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한 회장이 1951년 5월, 부산진구 범일동에 건평 80평짜리 빈 창고를 빌려 생산설비를 설치하고 잉크 제조를 재개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원료는 부족하고 시설은 빈약한 데다 전기는 수시로 정전이 되고 용수는 우물물을 길어 써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국가의 조폐사업에 참여한다는 자부심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겨나갔다. 생산한 제품은 주로 재무부 직할 인쇄공장에 납품했는데, 이때부터 ‘대한오브세트잉크’ 대신 ‘대한잉크’를 상표로 사용했다. 1951년 9월 2일 한국조폐공사법이 공포되고, 10월 1일 한국조폐공사가 설립되면서 한 회장은 인쇄잉크 제조에 관한 모든 기술을 조폐공사에 제공하고 지폐용 인쇄잉크의 납품을 중단했다. 다행히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일반 인쇄소의 주문이 늘어났고, 대구에 있는 전매국 인쇄공장에까지 잉크를 납품할 정도로 사업이 번창했다. 남포동에 2층 건물 전체를 빌려 1층은 상품 하치장으로, 2층은 영업소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의 일이다. 사업기반이 안정되자 한 회장은 대한잉크를 주식회사로 전환하기로 결정하고, 1952년 8월 26일 자본금 1억 원을 들여 주식회사 ‘대한잉크제조공사’를 설립했다.
5.도료사업의 모색과 노루표 브랜드의 시작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면서 3년간의 전쟁은 끝이 났다. 정부는 1953년 초부터 경제부흥 3개년 계획을 세우고 파괴된 산업을 복구하는 데 전념했고, 인쇄업계와 잉크제조업계 역시 서울로의 복귀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한정대 선대회장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잉크 외에 새로운 분야로의 진출을 적극 모색했다. 그간의 경험상 잉크제조업은 성장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걸 절감했기 때문이다. 당시 한 회장이 염두에 두었던 분야는 도료였다. 도료제조는 잉크 생산시설을 그대로 이용할 수 있고 원료도 대부분 동일하며 잉크 제조기술의 노하우를 그대로 활용할 수 있었다. 1953년 10월, 한 회장이 선진국의 잉크와 도료업계를 둘러보기 위해 홀로 유럽과 미국으로 산업시찰을 떠난 건 이런 이유에서였다.
한 회장이 첫 번째 해외 시찰에서 거둔 성과는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당시 세계 최고 도료업체였던 미국 셔윈 윌리엄스(Sherwin Williams)와의 대리점 계약이다. 한 회장은 셔윈 윌리엄스사에서 수지와 안료 등 원료를 수입하는 한편, 배합기술과 선진기술 정보를 지원받고 싶다는 뜻을 간곡하게 피력했고, 이는 셔윈 윌리엄스 사장의 마음을 움직여 대리점 계약 체결로 이어졌다. 두 번째는 독일 만(Man)사에서 수입한 54kW 발전기다. 부산 피난 시절 극심한 전력난을 겪었던 한 회장은 전력과 공업용수만큼은 나라에 의존하지 않고 자력으로 해결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만 사의 발전기 수입은 이를 가능케 할 동력이었다.
예기치 못한 성과도 있었다. 독일에서 체류할 당시 우연히 한 화랑에서 한 쌍의 노루 그림을 발견하고 이를 구매한 것이다. 평소 노루의 유순한 이미지를 좋아했던 한 회장은 회사의 상표를 노루표로 하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당시만 해도 글을 읽지 못하는 이들이 많은 나라의 현실을 고려해 동물을 기업의 상징물로 삼는 경우가 꽤 있었고, 한 회장은 대한잉크가 ‘절대 다른 동물을 해치지 않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노루’처럼 만인의 사랑을 받으며 영원히 발전하기를 바랬다. 그의 혜안은 적중했다. 오래지 않아 노루표 브랜드는 대한잉크의 상징이자 고품질 잉크의 대명사로 자리잡았고, 이후에도 꾸준히 사랑받으며 그룹의 정체성을 형성했다.
6.문래동 공장 건설
해외 시찰을 통해 국내 인쇄잉크와 도료 산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선진 기계설비 도입이 필수라는 걸 깨달은 한정대 선대회장은 현대식 공장 건설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폐허가 된 대한잉크의 공장을 단순히 복구하는 것을 넘어 새롭게 재탄생시키고자 한 것이다. 문제는 막대한 자금이었다. 당시 대한잉크의 주거래은행이었던 한국흥업은행(훗날 우리은행에 합병된 한일은행의 전신)은 새 공장 건설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대여해줄 만한 여력이 없었다. 당시로선 1954년 4월 1일 발족한 한국산업은행의 ‘선융자 후취담보’ 융자가 유일한 희망이었다. 한 회장은 한국산업은행 본점 임원들을 만나 인쇄잉크와 도료 산업 육성이 국민경제와 문화 발전에 미치는 중요성을 역설했고, 결국 1954년 10월 총 3,500만 환의 자금을 융자받는 데 성공했다. 총 공사비 75%에 해당하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해방 직후 국내 최초 흑잉크를 개발해 문화교육과 출판 산업에 기여해온 공로와 6·25전쟁 중 한국은행권 발행에 힘을 보태며 국가 재건에 적극 참여했던 대한잉크의 이력이 도움이 됐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융자를 받고 난 후 자재비가 큰 폭으로 상승하면서 부족한 공사비를 메우기 위해 대부분의 공사를 직영으로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1954년 12월 서울로 돌아온 한 회장은 교통이 편리하고 전기와 용수 사정이 좋은 새 공장 건설 부지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고심 끝에 서울시 영등포구 문래동 4가 44번지의 대지 2,965.1평을 매입해 공장 건설에 착수했고, 1955년 10월 5일 건평 107평 규모의 잉크실과 24평 규모의 발전실을 준공했다. 이를 기점으로 문래동 공장이 부분적으로나마 제품 생산을 시작하면서, 부산 범일동 공장의 가동을 전면 중단했다. 기존 생산시설과 인원 또한 모두 문래동 공장으로 이전했다. 문래동 공장의 준공이 가시화되면서 한 회장은 1955년 11월 1일을 창립기념일로 정하고 조촐한 기념행사를 가졌다. 이어 11월 26일에는 바니시실(20평), 안료실(30평), 유류창고(20평), 인쇄실, 실험실 등 총 건평 331.8평의 공장을 완공했다. 문래동 공장은 독일에서 들여온 54KW 발전기를 설치해 어려운 전력 사정에 대비했고, 지하 300m 깊이의 지하수를 끌어올려 용수를 자체 해결했으며, 잉크실에 7대의 분산기를 갖추는 등 현대식 생산설비를 구축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대한잉크가 생산한 모든 제품에 노루표 상표가 붙기 시작했다.
문래동 공장의 준공은 대한잉크의 새로운 출발로 이어졌다. 1956년 1월 12일 상호를 ‘대한잉크제조주식회사’로 바꾸고 기구조직을 정비해 경영체제를 새롭게 짠 것이다. 회현동 사무실은 회사의 전반적인 관리와 판매를 담당하고, 문래동 공장은 생산부서 외에 서무과와 기술개발을 전담하는 연구실을 설치했다. 공개 채용을 통한 인재 양성에도 힘썼다. 특히 한 회장은 연구실 설치와 운영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대학에서 화학과 화공을 전공한 공채 사원들을 연구실에 집중 배치해 인쇄잉크의 신제품 개발과 도료 생산 실험에 매진하도록 한 것이다. 연구실은 원색동판인쇄잉크와 금속인쇄잉크의 국산화, 광택바니시와 광택잉크 개발에 성공하는 등 인쇄잉크의 품질을 획기적으로 개선했을 뿐 아니라, 대한잉크가 인쇄잉크와 도료 분야에서 국내 선두기업으로 자리매김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7.미(美) 군납 성공과 도료사업의 본격화
문래동 공장의 가동 이후 대한잉크는 도료의 시험제조에 박차를 가했다. 인쇄잉크와 도료는 생산시설과 제조과정이 거의 동일해 작업실과 설비를 구분하지 않고 함께 사용했는데, 당시만 해도 잉크업계가 활황이던 시절이라 현장 직원 대부분은 도료의 시험생산을 귀찮아했다. 그러나 한정대 선대회장은 대한잉크의 미래기반 마련을 위해선 도료업계 진출이 필수라고 판단했다. 도료의 성수기가 봄, 여름, 가을이라면 인쇄잉크의 성수기는 겨울과 이른 봄이니 도료와 인쇄잉크를 동시에 생산한다면 회사는 항상 성수기를 유지할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한 회장은 일단 주한 미군에 군납하는 방식으로 도료시장에 진출하기로 마음먹고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먼저 미국 셔윈 윌리엄스사에 미연방규격에 관한 자료를 요청하는 한편, 미8군 구매처(KPA)를 방문해 도료 납품을 교섭했다. 그러나 KPA는 한국의 도료 제조기술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 한 회장은 이를 불식시키기 위해 셔윈 윌리엄스사와의 대리점계약서를 제시하며 KPA를 설득했고, 문래동 공장을 본격 생산단계로 정비해 1956년 말 KPA 관계자들의 공장 시찰을 추진했다. 시찰 후 대한잉크의 공장 시설에 크게 만족한 KPA는 미연방규격 TT-P-102 코드랜드그린과 애플그린 등의 견본판을 요청했고, 대한잉크는 이를 거뜬히 통과했다. 하지만 견적서 제출 과정에서 약간의 문제가 발생했다. 최신 원료 가격을 참조해 제출한 대한잉크의 견적가가 미8군 구매처의 내정가보다 높아 구매가 어렵다는 회신을 받은 것이다. 이에 대한잉크 기술진은 밤샘작업을 해가며 규격을 준수하면서도 생산단가를 낮출 수 있는 원료를 찾아냈다. 그리고 마침내 1957년 4월, 국내 최초로 미연방규격 조합페인트(규격명: TT-P-102 코드랜드그린)를 미8군에 납품하는 데 성공했다.
대한잉크의 미연방규격 도료 생산은 국내 도료공업의 성장과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를 계기로 한국군의 군납품에도 미연방규격 제품(FS 또는 Mil 규격)이 요구됐고, 이에 따라 도료 제조시설의 보완, 각종 시험기구의 완비, 원자재의 다양화, 도료 규격 준수 및 품질관리 등이 업계의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대한잉크 역시 미 군납 유지와 품질 향상을 위해 미연방규격 검사 시험기인 촉진내후성 시험기(Weather-O-Meter)를 도입했다. 당시 가격이 10만 달러에 달하는 고가의 장비라 반대 의견이 상당했으나 한 회장은 지금 당장의 이익보다 미래를 내다보고 결단을 내렸고, 이는 실제로 미 군납의 지속적 신뢰 확보와 품질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1957년 말 100만 달러 상당의 주한유엔군 납품 계획이 무산될 위기에 처했을 때, 촉진내후성 시험기 덕분에 일본 화학연구소의 판정 오류를 바로잡아 수주를 성사시킬 수 있었다.
미 군납을 계기로 1957년 8월 7일 특허청에 노루표 상표등록을 한 대한잉크는 1959년 4월 9일에는 회사의 상징인 노루마크를 특허청에 상표등록을 마쳤다. 1959년 1월 새로운 도료실을 준공하고, 1961년 9월 연구실과 사무실을 신축한 것도 미 군납 성공과 도료사업 진출이 남긴 결과였다.
8.품질제일주의 실현
대한잉크는 미8군 외에 육군에도 도료를 납품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1961년 육군 일선부대 막사 개축공사는 그 의미가 남달랐다. 이미 도장을 완료한 막사들이 방수가 되지 않아 비가 새자 육군본부 공병감실에서 도장기술에 대한 자문을 요청해온 것이다. 대한잉크는 발수성이 뛰어난 자사 제품 ‘노루톤’을 추천했지만 당시 육군본부의 납품 내정가는 제품 원가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대한잉크는 일선에서 나라를 지키는 장병들의 노고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손해를 감수하며 납품을 강행했다. ‘사업은 눈앞의 이익만 추구하기보다 경우에 따라 손해도 감수할 줄 알아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한 것이다. 대한잉크의 이 같은 원칙은 이후 더 큰 보상으로 돌아왔다. 당시 육군본부 공병감실에서 근무했던 장성들이 예편 후 주택공사 등 정부 주요기관에 배치되면서 각종 정부 공사에 노루표페인트를 추천했고, 이는 대한잉크의 국내 도료시장 연착륙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한편 1960년 초반 수출 실적에 육박할 만큼 성장세를 누렸던 군납 실적은 나날이 악화됐다. 군납업자들 사이에 반목과 경쟁이 심화된 까닭이다. 이에 물품군납업체들은 1962년 6월 한국물품군납조합을 설립하고 한정대 선대회장을 초대 이사장으로 선임했다. 한 회장은 때마침 강화된 바이 아메리칸 정책으로 어려움에 처한 한국 군납업계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미 국방성에 바이 아메리칸 정책 완화를 촉구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도료의 미 군납은 1963년 중단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큰 타격을 입은 대한잉크는 내수시장 개척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가장 큰 난관은 가격이었다. 노루표페인트는 최신 시설과 우수한 기술 덕분에 품질은 탁월했으나 값이 비싸고 중간 마진이 적어 도장업자와 인쇄업자들의 선호도가 낮았던 것이다. 이에 한 회장은 ‘제조업의 생명은 제품의 품질에 있다. 비싼 값을 하는 상품이라면 결코 시장경쟁에서 뒤질 리가 없다’는 생각으로, 대한잉크의 우수한 품질과 가치를 널리 알릴 수 있는 아이디어와 다양한 판매방법을 모색했다.
1962년 6월 조달청에서 우량상을 수상하는 등 정부 관계기관으로부터 품질의 우수성을 인정받으면서 상황은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특히 1962년 7월 1일 설립된 대한주택공사의 마포아파트 건설은 대한잉크의 입지를 넓히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대한주택공사가 대한잉크에 주문한 도료 납품을, 한 회장이 국내 도료업체간 품질경쟁을 통해 선정할 것을 제안한 게 계기가 됐다. 한 회장의 의견을 받아들인 주택공사가 각 도료업체들로부터 견본을 받아 실험을 실시해 대한잉크의 수성페인트 ‘노루톤’을 최종 선정한 것이다. 이제는 국내 도료업계도 품질보증 체계와 건전한 유통질서를 확립해야 한다는 한 회장의 신념이 빛을 발한 결과였다. 이후 주택공사의 모든 공사에 노루표 제품이 사용되고, 주택공사 현장마다 대한잉크 직원이 도장을 감리하는 체계가 구축됐다. 도막에 대한 하자보증을 실시한 것도 이때부터다. 이는 노루표페인트에 대한 소비자들의 선호도를 높이는 데도 기여했다. 주택 도장은 노루표페인트로 해야 한다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퍼져나갔고, 주택공사의 도장공사와 농협창고의 보수 도장을 대한잉크가 도맡으면서 국내 건축용 도료시장에서 탄탄한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
9.사세 확장에 따른 경영체제 합리화 시행
도료사업 본격화에 따른 가파른 사세 신장은 경영체제의 합리화로 이어졌다. 1960년 사훈 제정이 그 시초였다. 사훈은 ‘친절과 지성’, ‘상호 협조’, ‘면학 수양’, ‘창의성 발휘’, ‘신속·진취·개선’의 다섯 가지로, 이후에도 노루그룹의 정신적 좌표로 그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을지로에 새 사옥도 마련했다. 1962년 8월 을지로 3가 75번지의 대지 74평 3층 건물을 매입해 1963년 1월 12일 총 건평 220평 규모의 4층 사옥을 완공한 것이다. 1963년 1월 20일에는 ‘대한잉크제조주식회사’에서 ‘대한잉크페인트제조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했다. 당시 확대일로였던 도료사업의 비중을 반영한 것이다. 1963년 1월 관리 체계화의 기틀이 되는 ‘대한관리규정’을 제정한 것도 주목할 만한 변화다. 이때부터 능률 향상, 품질 향상, 원가 절감 등 경영합리화를 위한 관리체계가 확립되기 시작했다. 1963년 3월 19일에는 사우회도 발족했다. 사우회는 사원 급여의 1%를 회비로 적립하고 회사 보조금 및 기타 수입으로 사원 경조사를 지원하는 한편, 생활필수품을 공동 구입·판매하고, 본사와 공장 내 매점을 운영하며, 회원에 대한 대출업무를 취급하는 등 사원복지 향상 및 사원간 상호친목 도모에 크게 기여했다.
경영체제 합리화는 사원들의 일에 대한 열정과 의욕을 북돋아 다시 회사의 성장·발전을 촉진하는 선순환으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신기술, 신제품 개발도 더욱 활발해졌다. 건축용 도료에서 공업용 도료, 선박용 도료로 제품의 폭이 확대됐고, 실질적인 성과도 잇따랐다. 1964년 7월 다색채 도료 ‘무늬코트’가 도료업계 최초로 발명특허(제1417호)를 획득한 데 이어, 10월에는 방청도료 ‘메타론’과 광택인쇄잉크가 각각 발명특허(제1463호, 1464호)를 획득했다. 1965년 7월 1일 발명특허(제1657호)를 획득한 선저방오도료 ‘마린코트’는 국내 선박용 도료의 시초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미국산 도료와의 비교시험을 통과해 해군 함정용 도료의 대량 납품을 이뤄냈을 뿐 아니라, 대한해운공사, 조선공사와도 연이어 납품 계약을 체결했기 때문이다. 1965년 8월 31일에는 수성도료 ‘노루솔’이 발명특허(제1729호)를 획득했다. 특히 ‘노루솔’은 방수효과가 탁월해 건축용 도료시장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또 1966년 6월 8일 에멀젼수지 ‘아크론608’을 개발한 데 이어, 1968년에는 ‘아크론608’의 내한성을 보강해 ‘아크론608TF’를 출시하는 등 수성도료의 완전 국산화에 성공했다. 대한잉크페인트는 이처럼 차별화된 기술력으로 국내 도료업계를 선도하며 더 큰 성장을 이뤄냈다.
10.국내외 시장 개척과 안정적 판매기반 마련
1950년대 후반 불어닥친 인쇄출판업계의 불황은 국내 인쇄잉크업계에 새로운 고민을 안겨주었다. 기술의 발달로 생산량은 계속 증가하는 데 반해 수요는 늘 그에 못 미쳤기 때문이다. 대한잉크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생산량이 주문량을 초과해 재고가 쌓이면서 대책 마련이 시급해졌다. 이에 대한잉크는 밖으로 눈을 돌렸다. 해외시장 진출을 선언한 것이다. 원료의 65% 이상을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도 대한잉크는 1962년 홍콩에 200만 달러 상당의 오프셋잉크를 수출하는 데 성공했고, 이후 싱가포르 등 동남아 일대로 수출길을 넓혀 나갔다. 인쇄잉크사업이 해외시장에 주목하는 사이, 도료사업은 국산화와 품질향상에 집중했다. 도료의 경우 선진기술과의 격차가 큰 데다 원료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해 가격경쟁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잉크페인트는 당시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수출 합판 가공용 도료의 국산화에 매진했고, 하도용 ‘내추럴 필러(Natural Filler)’와 상도용 ‘클리어 락카(Clear Lacquer)’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또 관계당국에 수출용 원자재 원료에 대한 면세 혜택을 요청하고, 내국신용장(local L/C) 제도 마련에 일조하는 등 간접 수출의 형태를 빌어 국내 도료업계 최초로 해외 수출을 달성했다.
판매전략 역시 새롭게 짰다. 앉아서 고객을 기다리는 소극적 자세에서 벗어나 고객을 찾아다니며 능동적인 판매전략으로 전환했다. 1963년 회사 목표를 ‘전 사원의 세일즈맨화’로 삼은 게 계기가 됐다. 이를 위해 대한잉크페인트는 인쇄잉크와 도료 제품 전반에 대한 철저한 교육을 실시, 영업사원들이 현장에서 도장감리는 물론 도장까지 실시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도록 지원했다. 전국 판매망도 구축했다. 1962년 11월부터 1964년 2월까지 2년여에 걸쳐 부산, 대전, 광주, 대구 등에 출장소를 설치하는 한편, 1963년 5월 서울지역 직매소를 기존 1곳에서 8곳으로 확장했다. 이 같은 변화는 일반소비자들이 직접 노루표 상품, 서비스와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늘렸고, 대한잉크페인트의 판매활동이 전국 규모로 확대되는 결과를 낳았다. 1964년 7월부터 특약점 제도를 도입, 기존 직매소를 폐지하고 특약점 중심으로 운영방식을 개선한 것도 눈에 띄는 변화였다. 이는 재정 및 관리 문제, 파견 직원 선발 문제, 직매소에 대한 시중 도료상의 불만 등을 고려한 선택이었다. 이외에도 TV, 라디오 등 전파매체를 활용한 광고방송, 제품 카탈로그, 잡지 부록 등 인쇄매체를 활용한 제품 및 기업 홍보를 통해 노루표 브랜드를 일반 대중에게 알려나갔다. 국산 도료와 인쇄잉크의 우수성을 홍보하는 전시회도 열었다. 1965년 8월 22일부터 31일까지 신문회관에서 창업 20주년 기념사업으로 종합 전시회를 개최한 것이다. 이 같은 다양한 활동은 대한잉크페인트의 안정적인 판매기반 마련과 실적 향상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