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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 ~ 1988

Chapter_ 02

경쟁력 강화와 고도성장 실현

1967 ~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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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에 발간한 사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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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12.18. 구로공장 준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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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 대한조화공업 조립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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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노루표페인트 TV 광고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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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05. 기업 상장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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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06.05. 구로공장을 방문한 박정희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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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10.12. 제2회 사내축제체육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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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11.30. 한정대 회장 동탑산업훈장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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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04.01. 안양공장 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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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 대한잉크페인트주식회사 서울 사무소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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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 안양공장 생산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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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 제품 연구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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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08. 영국 인터내셔날페인트와 합작 조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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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03.31. 부산사옥 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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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05.09. 분체도료공장 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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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05.09. 분체도료공장 준공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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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07.11. 한일은행 41년 신용거래 감사패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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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11.01. 자동차용 도료 공장 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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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가정용 도료 광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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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02. 컬러 프레젠테이션(Color Preseentation)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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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02. 컬러 프레젠테이션(Color Preseentation)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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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02.18. 컬러 프레젠테이션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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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04.26. 제1회 전국도장기능경진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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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11.25. 사풍일신 추진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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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12.01. 기술연구소 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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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11.01. 창립 45주년 기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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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래동 공장 정문에 설치된 KS 표시품 생산공장 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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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계 최초 기술연구소 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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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계 최초 무인 자동화 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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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스틱사업부에서 생상한 인스트루먼트 패널

NOROO는 창업 직후 앞선 혜안과 과감한 결단, 품질제일주의를 기반으로 매년 눈부신 성장을 거듭했다. 이때 축적한 경험과 노하우는 1960년대 후반 시작된 글로벌 무대 진출의 토대가 되었다. 1970년대 중반 안양공장 건설로 대량생산체제를 확립한 NOROO는 니폰페인트, 셔윈 윌리암스, 인터내셔널페인트 등 세계 유수 도료업체와의 합작을 통해 선진기술을 도입하며, 경쟁력을 키워나갔다. 한편 이 시기에는 회장제 신설, 기획실의 위상 제고 등을 통한 세대 교체도 단행됐다. 이 같은 변화는 NOROO의 글로벌 시장 진출을 더욱 가속화한 것은 물론, 한국 도료산업이 세계적 수준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됐다.

1.‘사업보국’의 사명감으로 참여한 플라스틱 조화사업

창업 20년 만에 인쇄잉크와 도료 업계 정상의 자리에 오른 대한잉크페인트는 1966년 새로운 사업에 진출했다. 당시 강력한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펼치던 정부가 새로운 수출 유망사업으로 플라스틱 조화를 선택, 이를 추진할 업체로 대한잉크페인트를 지정한 것이다. 플라스틱 조화와 인쇄잉크·도료는 안료를 사용한다는 점 외에는 전혀 공통점이 없었지만, 대한잉크페인트는 ‘사업보국’의 사명감으로 참여를 결정했다. 정부 정책에 적극 호응하는 차원에서였다.

1966년 4월 20일 서울 구로동 한국수출산업공단 입주 기업체로 지정된 대한잉크페인트는, 6월 20일 공단 내 대지 3,993평을 매입해 10월 1일 공장 건설에 착수했다. 또한 2,000만 원의 자금을 출자하고 70만 달러의 현금 차관을 받아 1967년 5월 플라스틱 조화 제작에 필요한 블로 몰딩 머신, 드릴 머신 등 30여 대의 기계를 들여왔다. 홍콩의 조화 기술자 14명을 선발해 생산 준비도 본격화했다. 1967년 10월 17일 주식회사 대한조화공업사(1968년 9월 23일 대한조화공업주식회사로 상호 변경)를 설립하고 11월 30일 시제품 생산에 들어간 것이다. 12월 18일 공장 준공을 완료한 후, 12월 30일에는 미국 노만무역상사(Norman Import & Export Co.)로부터 15만 달러 상당의 신용장도 수령했다.

그러나 정부 정책 하에 급하게 추진한 플라스틱 조화공장은 가동 직후 예상치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당시 국내 플라스틱산업 구조가 취약해 수십 종에 이르는 조화 부품을 대한조화에서 직접 생산해야 했던 것이다. 필요한 인력과 설비, 자금은 계속 늘어났고, 원가 부담이 커져 가격 경쟁력에서도 홍콩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1968년 한 해 동안 일본과 미국에 수출한 조화는 324톤, 24만 8,240달러에 그쳤다. 1968년 9월 1일 한국무역박람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고, 외국 대통령 내한 시 영부인의 단골 시찰 코스로 선정되는 등 활발한 선전활동을 펼쳤지만 역부족이었다.

이 같은 수출부진을 만회하기 위해 대한조화는 1969년 9월 뉴욕시 5번가에 지점을 개설하고 카탈로그를 만들어 방문판매를 기획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영업성과는 여전히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3년 동안 매출 손실이 2억 원대를 넘어서자, 대한잉크페인트는 1970년 9월 30일 대한조화를 흡수 합병해 프라스틱사업부로 전환했고, 1971년에는 생산품목을 플라스틱 조화에서 공업용 플라스틱 부품으로 변경했다. 그 결과 1973년 매출 13억 7,000만 원, 순이익 9,000만 원의 흑자를 기록할 수 있었다.

한편 수출업체였던 대한조화를 흡수 합병하면서 새로운 수출창구가 필요해진 대한잉크페인트는 1970년 10월 16일 코리아프라스틱주식회사[1977년 주식회사 세다(世多)로 상호 변경]를 새롭게 설립하고 1971년 3월 3일 무역업체로 등록했다.

2.해외 수출에 기여한 완구 제조업

플라스틱 조화사업의 한계를 절감한 대한잉크페인트가 새롭게 찾아낸 사업 아이템은 플라스틱 인형완구 제조업이었다. 세계적 인형완구 판매회사인 미국의 마텔(Mattel)사와 거래 경험이 있는 일본의 협화화학과 1970년 9월 50대 50의 합작투자계약을 체결하고, 양 사의 머리글자를 따 ‘주식회사 대협’을 설립한 것이다. 1970년 12월 8일 정부로부터 외국인투자인가 승인을 받은 대협은, 1971년 2월 일본에서 봉제기 100대와 인형직모기 60대를 도입하고 800명의 생산직 여공을 모집해 3월 시험생산에 들어갔다. 사업 초반 인형옷 등 봉제품을 일본 등지에 수출하던 대협은 1972년부터 목제완구와 플라스틱 인형을 본격 생산하기 시작했다.

사업 초기, 대협은 성장일로를 걸었다. 1972년 인형완구 단일 품목으로 국내 1위의 수출 실적을 올려 대통령 표창을 수상한 데 이어, 1973년에는 산업포장을, 1974년에는 동탑산업훈장을 수훈했다. 1975년 12월 성장세에 맞춰 봉제기계 300대를 증설하는 등 생산설비를 대폭 확대한 데 이어, 1975년 12월 27일에는 외화의 국외유출 최소화를 위해 협화화학과의 합작 기간을 10년에서 5년으로 단축하고 지분을 모두 인수해 국내 법인으로 새 출발했다. 1976년에는 기업공개 대상 법인으로 지정돼 동년 6월 25일 기업공개를 단행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수출산업공단을 휩쓸던 노동운동의 여파로 1977년 6월 6일 파업이 발생하면서 심각한 위기가 찾아왔다. 7월 중순까지 파업이 이어지면서 생산 기능이 거의 마비돼 수출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 것이다. 7월 하순, 회사의 노력으로 간신히 생산이 재개되긴 했으나 근로자들의 태업으로 생산능률은 저하되고 불량품마저 늘어났다. 1977년 88%에 달하던 생산능률이 1978년에는 40~50%까지 떨어졌다. 납기일까지 주문물량을 선적하지 못하는 일이 빈번해지자 고정 거래선인 마텔사는 대협의 발주량을 500만 달러 미만으로 한정하고 홍콩, 대만 등으로 발주처를 전환했다. 수출 물량이 70% 이상 줄어들자 생산설비와 인력 대부분이 남아돌기 시작했고, 고정비에 대한 부담이 가중돼 적자경영에 들어서게 됐다. 결국 대협은 1980년 7월 30일 기술과 시설을 대한잉크페인트 프라스틱사업부로 이전하고 영업 활동을 중단했다. 1971년부터 1978년까지 무려 8,000만 달러에 달하는 해외 수출을 달성하며 외화 획득과 국가 경제발전에 큰 몫을 담당했던 기업의 아쉬운 퇴장이었다.

3.제품 다각화와 기업 공개를 통한 경쟁력 제고

1960년대 건축용 도료가 주종이던 대한잉크페인트의 생산제품은 1970년에 들어서면서 공업용 도료로 확대됐다. 아세아자동차, 현대자동차 등에 자동차용 도료를 공급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한잉크페인트는 이에 발맞춰 신제품·신기술 개발은 물론, 선진기술의 선도적 도입에도 앞장섰다. 특히 해외 선진기업과의 기술제휴와 합작사 설립에 주력했는데, 이는 단순히 해외 기술을 도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글로벌 시장에 진출해 선진기업들과 경쟁하며 한국 도료산업의 발전을 이끌겠다는 일종의 선언이었다.

1975년 4월 대한잉크페인트의 기술진들이 니폰페인트 오사카공장으로 파견을 나가 1개월간 가전도료 기술연수를 받고 돌아온 것을 시작으로 다양한 형태의 기술협력이 잇따랐다. 이 기술연수는 1966년 11월 업계 최초로 니폰페인트와 기술 및 업무제휴를 체결한 데 이어, 1972년 7월 도료 전반에 대한 기술제휴 및 판매제휴를 체결한 게 계기가 됐다.

1970년대는 도료업계에 있어 격동의 시기였다. 1970년대 초 정부가 새마을운동을 시작하면서 슬레이트용 도료 생산이 급증했고, 1972년에는 중화학공업 육성이 핵심인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도입, 도료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러자 대기업들이 잇따라 도료산업에 진출, 대규모 양산체제를 갖추기 시작했고, 군소업체들은 살아남기 위해 저품질의 제품을 저가로 공급, 가격경쟁을 부추겼다. 그러나 대한잉크페인트는 이런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꿋꿋이 품질관리를 체계화하고, 발명특허 획득에 매진하는 등 노루표 브랜드의 이미지 제고에 주력했다. 이 시기 획득한 대표적 발명특허로는 방수성 보호도료 ‘워타론’(발명특허 제2279호, 1967.04.20), 내수성 속건 바니시 ‘하이라크’(발명특허 제2800호, 1968.09.16), 내알칼리성 방수도료 ‘세라민’(발명특허 제3113호, 1969.07.31), 의장용 합성도장제 ‘하이텍스’(발명특허 제3453호, 1970.0.21), 의장용 균열도로(발명특허 제4310호, 1974.07.10), 목재가공용 도료(발명특허 제4741호, 1975.07.10) 등이 있다.

1973년에는 도료업계 최초로 기업 공개도 단행했다. 사세가 확장되고 기업 규모가 커짐에 따른 선택이었다.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기업이 재산의 사회 환원을 의미하는 기업 공개를 꺼리는 추세였지만, 한정대 선대회장은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한잉크페인트의 기업 공개를 강력하게 추진했다. 당시 대한잉크페인트는 6월 29일부터 7월 2일까지 3일 간 신주 공모를 실시, 56대 1의 높은 공모율을 기록했다. 신주 발행가는 500원이었다. 공개 후 자본금 총액은 3억 4,030만 원에서 5억 원으로 늘어났다. 이후 2년 동안 연 15%의 배당을 보장하는 우선주 31만 9,400주를 발행하고 그 중 10%를 종업원들에게 우선 배정했다. 또 종업원들의 애사심을 높이고 회사와의 일체감을 고취하기 위해 종업원지주제를 도입, 이를 토대로 1975년 1월 15일 우리사주조합을 결성했다.

4.안양공장 건설로 대량생산체제 확립

1973년 7월, 대한잉크페인트는 지속적 사세 신장과 급증하는 시장 수요로 인해 생산능력이 한계에 다다르자 신공장 건설을 추진했다. 1955년 준공한 문래동 공장만으로는 급격한 수요 증가를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안양시 박달동 안양천변 인근에 마련한 신공장 부지는 총 3만 9,492.5평 규모였다. 대한잉크페인트는 총 공사비와 시설도입자금으로 6억 7,000만 원을 책정했고, 시설자금은 31만 달러의 차관과 5억 4,700만 원의 자기자금으로 충당했다.

공사는 3년 여간 계속됐다. 먼저 1973년 9월 25일 공장용지 조성에 돌입했다. 장마에도 침수되지 않고 배수가 잘 되도록 안양천의 제방과 같은 높이로 용지를 조성하는 데 약 2만 6,000 트럭 분량의 흙이 투입됐다. 공사 후 앞산이 완전히 없어지고 지도가 바뀌는 대공사였다. 용지 조성이 끝난 1974년 3월부터 연건평 1,060평의 창고 2동과 지하 수조 2개소를 먼저 건립했는데, 이 공사 중 약 2,000㎡의 옥모래가 채취돼 모두가 이를 길조로 여겼다. 실제로 이 모래로 11만 개의 블록과 하수도 토관 등을 시공했는데, 공사가 끝날 때까지 단 한 건의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다. 안양공장 건립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과학적 시공방법이 총동원된 공사였다. 충분한 일조량의 확보와 화재를 대비해 건물 간 거리를 18m 이상 간격으로 배치했고, 80톤의 물을 저장할 수 있는 높이 27m의 물탱크, 300명을 동시 수용할 수 있는 식당, 12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기숙사 등도 건립했다. 건물 17개 동, 연건평 7,220평에 달하는 규모였다.

1975년 11월 1차로 유지1·2부가 이전한 데 이어 1976년 4월 1일 준공에 맞춰 잉크페인트사업부가 모두 이전을 완료했다. 대한잉크페인트는 안양공장의 준공으로 명실상부한 대량생산체제를 확립했고, 신속한 신제품 개발 및 품질 향상까지 이뤄냈다. 1977년 2월에는 안전관리규정을 제정해 각종 안전사고를 예방하고 안전한 작업환경을 구축했다. 준공 이듬해인 1977년 7월, 예상치 못한 큰 비로 일부 공장과 창고가 침수되는 어려움을 겪었으나, 직원들이 밤을 새가며 보전 및 복구작업을 벌여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대한잉크페인트는 이 물난리로 약 6,500만 원의 피해를 입었고, 수주에도 상당 부분 차질을 빚었다.

5.기술연구소 설립과 선진기술 도입

1976년은 대한잉크페인트의 새로운 터닝포인트가 된 한 해였다. 그해 경영지표를 ‘기술개발의 해’로 정하고 독립연구기관인 기술연구소를 신설했을 뿐 아니라, 새로 건립한 안양공장으로의 이전을 완료한 해이기 때문이다. 기술연구실은 제품 개량 연구, 신제품 개발 연구, 수입원료 대체 연구 등을 담당하는 기술연구팀과 기술정보의 수집·관리·활용에 관한 연구, 품질 향상과 신제품 개발을 위한 시장 수요 조사 등을 담당하는 기획팀으로 구성됐다. 또한 연구개발에 매진할 수 있도록 기술연구의 독립성·전문성을 강화하고 기술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체제를 마련했다. 합성피혁용 도료 생산·판매를 전담하는 특수도료사업부, 일정기간 소지 산화를 방지하는 전처리제 도료 생산을 담당할 ACP부를 신설한 것도 주목할 만한 변화다.

신제품 개발과 발명특허의 획득도 속속 이루어졌다. 1976년 방화도료 ‘노부렉스(발명특허 제5105호, 1976.02.14)’와 융착식 도로표지용 도료(발명특허 제5261호, 1976.08.10)가 발명특허를 획득한 데 이어, 1978년에는 난연성도료 ‘화스탄’(발명특허 제5699호, 1978.05.22)을 국내 최초로 개발해 화제를 모았다. 또 같은 해 발수성 광택 에멀젼도료 ‘광택스’(발명특허 제5958호, 1978.07.01)와 수성다채도료 ‘무늬코트’(발명특허 제6185호, 1978.07.01)가 발명특허를 획득했다. 이외에도 1991년 저온경화형 도료 알키드수지 조성물, 무공해 지문방지용 금속표면처리제 등이 발명특허를 획득했고, 무공해 수성도료인 방청 푸라이마 ‘코로텍스’, 도료 조색제 ‘칼라톤’ 등의 신제품 개발도 이어졌다. 이때 선보인 신제품·신기술은 도료의 대중화뿐 아니라 대한잉크페인트의 위상 제고에도 크게 기여했다.

자체 기술 및 신제품 개발에 도움을 줄 선진기술 도입과 생산시설 보강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978년 7월 일본 도시바케미컬로부터 특수절연 바니시 제조기술을 도입한 데 이어, 같은 해 12월에는 미국 릴라이언스 유니버설(Relience Universal)사에서 목공용·플라스틱용 도료 제조기술을 도입했다. 볼 밀(ball mill), 슈퍼 밀(super mill) 등 40만 달러 상당의 생산시설 보강도 함께 추진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기술 도입선을 유럽과 미주 지역으로 확대하고, 기술 도입 분야도 다양화했다. 이에 따라 분체도료, 자동차보수용 도료, 자동차용 플라스틱 부품 도료, 악기용 도료, PCM 도료, 항공기용 도료 등으로 꾸준히 영역을 넓혀나갈 수 있었다.

한편, 기술연구소는 1985년 11월 1일 기술개발부 중심으로 새롭게 체제를 정비하고, 이듬해인 1986년 2월 3일 과학기술처로부터 기업 부설 연구소로 정식 승인을 받았다. 기술연구소 조직이 안정되자 자체 기술개발도 차츰 속도가 나기 시작했다. 1986년 9월 국내 최초로 섭씨 180도 고온에서 견딜 수 있는 H종 함침용 절연바니시(DVB-2152)를 개발해 미국안전규격 UL을 통과한 데 이어, 1987년 7월에는 동남아시아 최초로 섭씨 200도의 고온에 견디는 N종 함침용 절연바니시를 개발해 UL 인증을 획득했다. 또 1988년 11월에는 국내 최초로 수용성 함침용 절연바니시의 UL 인증을 획득했다. 이 같은 대한잉크페인트의 신기술 개발 성과는 그간 수입에만 의존해오던 업계의 원가 절감과 국내 함침용 절연바니시 기술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6.세대 교체와 종합경영정보시스템 도입

대한잉크페인트는 안양공장 준공을 눈앞에 둔 1975년 11월, 회사 경영체제를 새롭게 정비했다. 먼저 11월 1일 잉크페인트사업부에 기능별 본부제를 도입, 대기업의 도료사업 진출과 업계의 과당경쟁 등 급변하는 기업환경에 적극 대처했다. 11월 5일에는 을지로 본사 기구도 개편했다. 판매기술부를 신설해 판매부서에 대한 기술지원체제를 강화했고, 직매부 선박도료과를 수요처가 밀집한 부산출장소로 이전했다. 안양공장 준공 이후인 1976년 7월 23일에는 공장장 및 부공장장제를 신설했고, 8월에는 원가관리 강화를 위해 생산관리부 작업과와 통계과의 명칭을 작업관리과, 원가관리과로 바꾸었다. 1977년 1월에는 을지로 본사를 판매부서만 제외하고 모두 안양공장으로 이전했다. 또 같은 해 3월 4일 본사와 잉크페인트를 잉크페인트사업부로 통합, 조직체계를 페인트사업부와 프라스틱사업부로 이원화했다. 1980년 3월에는 부산시 금정구 부곡동에 지하 1층 지상 3층, 총 건평 394.6평 규모의 부산 신사옥을 완공, 국내 선박 및 중방식 도료시장 공략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회장제를 신설, 세대 교체의 단초를 마련한 것도 이즈음이다. 1979년 말에서 1980년 초, 정치·사회적으로 격동의 시기를 지나면서 인쇄잉크와 도료 업계에도 위기감이 고조되고 불확실성이 증대됨에 따라, 이에 대응할 새로운 경영체제의 도입이 시급해졌다. 이에 대한잉크페인트는 1980년 2월 27일 제34기 정기주주총회에서 1인 대표이사제를 공동 대표이사제로 바꾸고 이사 중 회장과 사장을 선임하는 회장제를 신설했다. 이때 회장에는 한정대 사장이, 사장에는 한정호 부사장이 취임했다. 기획실이 회사의 정책을 입안하는 부서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1980년 4월 1일 새롭게 부임한 한영재 기획실장은 경영정보 분석의 과학화와 기업 이미지 제고를 기획실의 1차 목표로 삼았다. 특히 부임 직후부터 종합경영정보시스템(MIS: Management Information System) 구축에 착수해 1983년 11월 MIS 1차 5개년 종합계획을 확정했다.

이후 대한잉크페인트는 책임경영체제 정착 및 MIS 구축을 더욱 가속화했다. 1983년 4월 1일, 잉크페인트사업부에 영업본부, 관리본부, 생산본부, 기술본부의 4개 본부 체계를 구축했고, 최고 경영층의 상설기관으로 비서실과 감사실을, 자문기관으로 자문위원실을 설치했다. 또 기획조정실 산하에 기획분석팀, 인사관리팀, 전산팀, 홍보팀, 해외사업부를 두는 등 기획조정실의 기능을 대폭 강화했다. 1984년 1월에는 기획조정실 전산팀에서 MIS실을 독립시키고, 개발팀, 운영팀, 정보기획팀의 3팀 체제를 구축했다. 7월에는 IBM-4331 컴퓨터 시설을 도입, 기능별 MIS 작업을 추진했다. 이를 통해 기존에 흩어져있던 경영자원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축적한 것은 물론, 인사·재무·영업·자재·기술·생산·기획 등 모든 부문의 업무 능률을 제고했다. 12월에는 담당 임원제를 도입, 실질적인 책임경영체제의 기반을 마련하는 한편, 을지로사무소를 여의도 삼환까뮤빌딩 9층(총 557.23평)으로 이전했다.

7.전국 판매망 확대와 해외시장 개척 본격화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한잉크페인트는 국내 판매망을 직매소에서 특약점 체제로 전환했다. 1974년 23개였던 대한잉크페인트의 전국 특약점 수는 1976년 말 102개로 급증했다. 판매액도 1974년 2억 3,000만원에서 1976년 15억 7,550만 원(도료 12억 928만 원, 인쇄잉크 3억 6,622만 원)으로 대폭 증가했다. 특약점의 판매 비중이 커짐에 따라 대한잉크페인트는 기존의 지방출장소를 연락사무소로 개편해 지방 특약점 관리를 강화하는 한편, 다양한 제도를 도입해 본사와 특약점 간 신뢰강화에 힘썼다. 1975년 6월 대구에 연락사무소를 설치한 것을 시작으로 1978년 3월 대전, 9월 광주, 11월 마산에 각각 연락사무소를 설치하고, 1979년 11월 우수 특약점 표창 제도를 도입했으며, 1981년 6월 업계 최초로 롯데백화점 본점에 매장을 개설해 가정용 페인트 중심의 판촉활동을 강화했다. 그 결과 1979년 10월 132개였던 특약점이 1984년 230개로 2배 가까이 늘어났다. 1985년 6월 제1회 특약점간담회를 열고 이를 연례행사로 정착시킨 것도 특약점 육성 및 지원책의 일환이었다. 이후 대한잉크페인트는 지방 특약점을 지원 관리하는 전국 판매망을 지점·영업소 체계로 개편, 1988년 말 1사무소(서울), 7지점(부산·광주·대전·포항·대구·마산·원주), 4영업소(울산·전주·순천·강릉) 체제로 재정비했다. 고객 서비스에도 만전을 기했다. 1985년 9월 대한주택공사 등 건축업계를 대상으로 색채조절의 원리와 현상을 설명하는 컬러 프레젠테이션을 실시했고, 1987년 2월에는 자동차용 컬러스톡시스템(Color Stock System)에 대한 세미나를 개최했다. 같은 달 23일에는 소비자상담실을 개설,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다양한 도료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해외시장 개척을 본격화한 것도 1970년대 중반부터다. 1975년 세계경제 회복과 함께 시작된 중동 건설 붐이 좋은 기회로 작용했다. 대한잉크페인트는 세계 각국의 공인기관 및 글로벌 엔지니어링 회사들로부터 품질승인을 획득하고, 한국 건설업체가 진행 중이던 중동 및 동남아 등지의 각종 공사에 도료를 수출하기 시작했다. 특히 까다롭기로 소문난 중동지역 COE(Corps of Engineering) 공사에서 품질승인 획득 및 제품공급을 성공리에 마친 게 도료 수출에 대한 자신감을 확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1980년 당시 기획조정실을 총괄하던 한영재 실장의 중동지역 순방도 대한잉크페인트의 수출 실적 제고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각국의 시장 규모와 특성, 시장가격을 조사해 면밀한 수출계획을 세우는 한편, 본격적 수출시장 개척을 위해 1982년 1월 15일 기획실 산하에 해외사업과를 신설, 수출업무를 전담케 한 것이다. 중동지역 수출은 1983년 11월 본격화해 많은 기록을 남겼다. 1984년 10월부터 1년간 세계 최대 규모의 리비아 대수로공사(Great Manmade River Project)에 중방식도료 30만 톤을 공급한 데 이어, 1985년 5월 8일 하루 동안 126개 컨테이너 분량(110만 리터)의 수성페인트를 리비아에 출고하는 대기록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도료 수출은 1980년대 중반 이후 해외 건설 붐의 퇴조와 함께 급격히 위축되기 시작했다. 대신 동남아시아 인쇄잉크 수출이 점차 증가했다. 1985년 이후 엔화 강세로 동남아시아 시장에서 일본의 경쟁력이 약화되자, 태국·홍콩·파키스탄·방글라데시 등지에 발 빠르게 해외 대리점을 개설, 인쇄잉크 수출에 박차를 가한 결과였다.

8.제2창업 선포를 통한 경영 합리화 시행

대한잉크페인트는 창립 41주년을 맞는 1986년 1월 1일, 새로운 도약과 미래성장을 위해 제2창업을 선포하고 ‘사풍일신(社風一新)’을 추진했다. 새로운 것을 찾아내고 미지에 도전하는 ‘정열’, 착수한 일을 당당하게 처리하는 ‘패기’, 어떤 난관도 뚫고 나가는 ‘박력’, 자신의 일에 소신을 가지고 대처해나가는 ‘책임’ 등 네 가지 실천방안을 제정하는 한편, 과학적·통합적 경영관리를 위해 투자관리제도를 도입하고 비용예산관리제도 지침도 마련했다. 경영 합리화를 위한 다양한 활동도 추진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1986년 6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200일간 진행된 원가절감운동 ‘SAVE 86, CD 200’이다. 여기서 ‘SAVE’는 Save Cost(경비 절감), Avoid Loss(낭비 근절), Value Analysis(가치 창조), Efficiency Improvement(능률 향상)를 의미하며, ‘CD 200’은 ‘Cost Down 200일’을 줄인 것이다. 대한잉크페인트는 운동 기간 동안 ‘백 원의 원가절감 6천 원의 매출증대’, ‘개선 위한 연구자세 원가절감 기틀 된다’와 같은 표어를 내걸어 직원들의 적극적 참여를 독려했다.

SAVE 86이 소기의 성과를 거두자, 대한잉크페인트는 1987년 말 또 다른 기업문화 캠페인인 ‘SIS 운동’을 전개했다. 이는 업무와 조직의 단순화(Simplification), 혁신(Innovation), 표준화(Standardization)를 의미하는 것으로, 급변하는 경영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고 의식개혁을 통해 기업체질을 강화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SIS 운동은 SAVE 86과는 달리, 회사의 경영관리 상태, 생산 및 기술 현황 등 기업 전반에 걸친 진단을 선행한 뒤 문제점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추진됐다. 활동의 중점은 관리부문의 업무 효율화, 생산부문의 생산 효율화에 두었고, 활동 내용은 전사적 분임조 활동, 제안 활동, 사내 표준화와 VE(Value Engineering) 활동을 통해 보다 구체화됐다. 1988년 12월 본격적 정착단계에 접어든 SIS운동은, 기업체질 개선과 경영 합리화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제2창업 선언으로 촉발된 업무·조직 혁신이 전 직원의 능동적 참여를 통해 긍정적 기업문화 정착이라는 성과로 돌아온 것이다.

9.특수도료 시장 진출로 해외 수출 가속화

1980년 10월 21일 대한잉크페인트가 세계적 종합도료회사 인터내셔널 페인트(International Paint, 이하 IPC,)와 합작해 설립한 ‘대한인터내셔널페인트주식회사(IPK, International Paint Korea Ltd.)’는 선박도료를 비롯한 특수도료부문의 전기를 마련했다. 1970년대 후반 국내 도료업체들은 국내 조선업 성장에 발맞춰 외국의 선박도료 제조기술을 적극 도입했는데, 기술제휴 형태로 국내에 들어온 외국 도료업체들은 계약 만료 후 독자적 판로를 구축, 1980년대 초반 국내 특수도료 시장의 약 90%를 장악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잉크페인트는 1978년 4월 IPC로부터 합작회사 설립 제의를 받고 1979년 8월 23일 합작투자에 합의했다. IPC와의 합작은 대한잉크페인트에게 선진기술과 자본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IPC 역시 높은 신용도와 탁월한 기술수용 능력을 가진 대한잉크페인트와의 합작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양사는 대한인터내셔널페인트의 본사를 안양시 박달동에 두고, 대한잉크페인트 한정대 회장과 IPC 넬슨(S. H. Nelson)이 공동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대한인터내셔널페인트의 설립은 대한잉크페인트가 중화학·조선·항공 등 국가기간사업의 필수품인 특수도료 개발에 앞장서는 계기가 됐다.

이후 대한인터내셔널페인트는 선체세척, 표면처리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과감한 판매 전략으로 국내 수리선 도료시장의 45%를 장악했다. 그 결과 1982년 총 매출액이 전년 대비 100% 증가했고, 1,046만 달러의 수출 기록도 달성했다. 1982년 11월 30일 제19회 수출의 날에 도료업계 최초로 ‘1,000만불 수출의 탑’과 철탑산업훈장을 수상한 건 이에 힘입은 성과다. 1984년에는 IPC와 분체도료 기술도입계약을 체결하고, 1985년 5월 9일 안양공장 2단지에 연간 생산능력 3,500톤 규모의 분체도료 공장을 준공했다.

대한잉크페인트의 제품 다각화는 자동차도료 전용 공장 건설로 이어졌다. 당시 기아자동차에서 생산하던 월드카 ‘프라이드’ 생산에 대응하기 위해, 제휴업체인 니폰페인트의 기술 지원을 받아 자체 공장 설계 프로젝트팀을 구성, 1985년 11월 토목건축공사에 들어간 것이다. 1년 여의 공사 끝에 1986년 11월 1일 국내 최초로 준공한 자동차도료 공장은 연간 20만 대분의 생산능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전 생산공정을 완전 자동화했다. 특히 배합공정의 자동계량장치, 분산공정의 24시간 무인운전시스템, 액체원료의 이송 라인화 등 최상의 정밀성을 구현했다. 1987년 3월 프라이드가 자동차시장에 돌풍을 일으키면서 자동차용 도료 수요가 급증하자, 대한잉크페인트는 1988년부터 1년간에 걸쳐 전용 공장의 생산설비를 증설했다. 그 결과 연간 자동차용 도료 2만 톤(자동차 100만 대분), 코일코팅용 도료 1만 톤(강판 50만 톤분)의 생산능력을 갖추게 됐다.

10.안양공장 증설과 플라스틱 제품 다양화

대한잉크페인트는 1977년 처음으로 연간 매출 100억 원을 돌파한 이래 눈부신 성장을 거듭했다. 특히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급증한 잉크페인트사업부의 자동차용 도료 판매 실적은 괄목할 만한 수준이었다. 1986년 전년 대비 49.3%의 신장률을 기록하더니, 1989년에는 1985년 대비 419.2%라는 놀라운 기록을 달성했다. 매출액 역시 1988년 951억 2,800만 원을 기록, 11년 만에 무려 10배에 달하는 성장세를 이뤄냈다.

특수도료의 수요 증가도 자동차용 도료에 못지않았다. 대한잉크페인트는 대한인터내셔널페인트의 특수도료 생산이 본격화함에 따라 안양공장의 증설 작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현대식 창고를 새로 지어 단위면적당 저장능력을 최대한으로 늘리고, 기존의 원료창고 2동(합계 1,052평)을 공장으로 변경해 지속적 수요 증가에 대응했다. 1986년 8월 안양공장 2단지의 대형 제품창고와 원료창고 자동화에 착수한 대한잉크페인트는, 1988년 7월 1차로 제품창고를 먼저 피킹 타입 시스템(Picking Type System)으로 변경했다. 저장능력 288팔레트(pallet)에 달하는 업계 최초의 무인 자동화 창고의 완성이었다. 또 1989년 6월에는 2차로 원료창고에 자동화 설비 구축을 완료하고 696팔레트의 저장능력을 확보했다. 안양공장의 창고 자동화는 생산관리의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버튼의 조작만으로 제품의 입출고가 가능한 시스템이라 인력관리의 효율화는 물론, 재고의 적정 확보와 적기적량 납품이 수월해 품질 유지 및 고객 서비스 향상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프라스틱사업부 역시 1980년대에 꾸준한 성장세를 유지했다. 전자 및 가전제품의 플라스틱 부품, 가정용 플라스틱 제품, 플라스틱 완구 등을 주로 생산하던 프라스틱사업부는, 1977년 2월 판매단가가 유리하고 용량이 큰 플라스틱 컨테이너를 주력상품으로 선정했다. 자체 기술로 금형 개발에도 성공한 프라스틱사업부는 향후 사업 전망이 밝은 금형업에 진출, 1979년 국내 최초로 필리핀에 컨테이너 금형을 수출하는 성과를 거뒀다. 1980년대 중반부터는 자동차용 플라스틱 부품 생산에 주력했다. 1985년 4월 개발리스자금으로 국내 최대 규모인 2,500톤 대형 사출기를 일본에서 도입해 자동차 계기판 등 대형 성형물 제작을 시작한 것이다. 이후 프라스틱사업부는 1986년 마쓰다자동차 플라스틱 부품 업체인 일본 대협과 범퍼, 쿼터트림, 프론트 필러 트림 등에 대한 기술제휴를 맺고 자동차 부품 전문업체로서의 기반을 다지는 한편, 152종의 인스트루먼트 패널 금형을 개발해 자동차 생산업체에 공급하는 데 성공했다. 또 금형의 설계부터 제작까지 전 과정에서 고도의 기술 발휘가 가능한 CAD(Computer Aided Design)시스템도 전격 도입했다. 1988년 4월에는 국내 최초로 일반성형사출부문에서 금형가공기술 1등급을 획득했다. 대한잉크페인트 프라스틱사업부의 금형 기술 우수성을 대내외에 입증한 쾌거였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 역시 프라스틱사업부의 성장을 이끌었다. 두 대회를 겨냥해 개발한 컬러 플라스틱 의자가 단순한 디자인과 다양한 컬러로 혁신의 바람을 불러 일으킨 것이다. 특히 국내 최초로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수지인 ‘나일론6’를 이용해 생산한 플라스틱 의자는 프라스틱사업부가 올림픽 특수를 마음껏 누릴 수 있게 해준 일등공신이었다.